리차드 베네트

카톨릭 교회는 성체라고 불리는 둥그렇고 흰 웨이퍼 안에 그리스도의 실제 몸과 영혼과 신성이 들어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카톨릭 교회의 교리인 화체설에 의해 설명되는데,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공식적 가르침은 다음과 같습니다.

“축성에 의해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 축성된 빵과 포도주 아래에는 살아계신 영광스러운 그리스도께서 친히 참으로 실제로 본질적으로 계신다. 성체는 주의 영혼과 신성과 함께 주의 몸과 피이다” (신조 구문 1413).

그러므로 로마 교회는 웨이퍼 형태의 성체는 주님의 실제 몸과 영혼과 신성을 담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축성 후에는 빵과 포도주의 성분이 전혀 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생긴 모양 외에는 그 전부가 하나님의 완전한 신성과 영혼, 몸, 피, 뼈, 신경, 근육, 동맥, 힘줄 이 다 있는 인성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로마 교회는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영성체 모양으로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것은 유일한 것이다. 이 점은 성체 성사를 다른 모든 성사 위에 올려 ‘영적 생명의 완전함이며 모든 성사들은 이 목적에 이바지 한다.’ 가장 복된 성체 성사 안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과 신성과 함께 주의 몸과 피가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 전체가 참으로, 실제로, 본질적으로 그 안에 담겨 있다” (신조 구문 1374).

이 교리 주장에 따르면 주님은 빵으로 보이는 모든 재질 전부에 있을 뿐만 아니라 주님은 또한 그 빵이 찢겨질 때 그 찢겨진 빵의 모든 부분에 완전하게 존재하십니다. 주님의 모든 신성과 인성이 모든 빵 조각과 포도주 방울에 다 담겨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카톨릭의 공식적 가르침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체적 존재는 축성의 순간부터 시작하여 영성체가 존재하는 한 계속 된다. 그리스도는 각 영성체 안에 전부 그리고 온전히 존재하며 각 영성체 부스러기에도 전부 그리고 온전히 존재한다. 즉, 빵을 뗀다고 하여 그리스도가 나뉘지는 않는다” (신조 구문 1377).

성경은 주의 재림 전에 이 땅에서 그리스도가 신체적으로 존재한다는 주장에 대해 경고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조언하시길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막 13:21)라고 하셨습니다. 신체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때는 숨겨진 방법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할 것”(눅 17:24)입니다. 이 구절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오심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오심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로마 교회의 법령에 의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는 빵 전부에 완전하게 계시며, 포도주에도 또한 완전하게 계십니다. 심지어 주님은 각 요소의 모든 부분에 그대로 계십니다. 로마 교회는 주 그리스도 예수가 이 세상의 수 많은 제단에 셀 수 없이 많은 웨이퍼로 오실 때 조금도 손상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사람으로 나타나지 않고 빵으로 나타난다고 가르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이며 주님을 부끄러움 가운데 두려는 시도입니다. 로마 교회에 의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취하시는 모양은 빵과 포도주인데 그 모양으로는 주님은 걷거나 말하실 수 없습니다. 주님은 동물보다 더 낮은 차원의 존재 형태로, 즉 빵과 포도주의 무생물체의 존재 형태로 그 품격이 저하된 것입니다.

로마 교회의 이 가르침은 사실 하나님의 아들에게 최대의 모독을 퍼 붓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에게 아들을 경외하라고 명하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도 모독이 됩니다. 이처럼 그들은 그리스도를 잘못 전함으로써 주님을 공적으로 부끄럽게 만들고 명예를 훼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공적인 가르침에도 “신성 모독의 위험”을 인정합니다 (법전 938). 빵과 포도주라는 외부의 물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물리적으로 담겨 있다는 교리는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며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어처구니없는 거짓과 노골적인 우상 숭배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빵을 먹으라고 말한다.

카톨릭 교회의 화체설의 가르침은 성경의 진리와 감각의 증명과 이성 그 자체를 노골적으로 부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교회는 이 교리를 고집하는데 그 이유는 성체 성사는 카톨릭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 교훈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습니다.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바뀜으로써 그리스도는 이 성사에 존재한다.” (신조 구문 1375).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주의 성찬에서 먹는 것은 빵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 성령께서는 분명히 다음 말씀으로 진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 을 먹을 때마다,” “누구든지 주의 떡을 먹는 자는,”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을 먹고” (고전 11:26-28). 지시 형용사 “이 떡” “저 떡”은 이 구절이 언급하는 요소가 떡에 제한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말해 줍니다. 이 외 다른 설명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카톨릭 교우들은 성체를 예배하도록 강요받는다.

그러나 로마 교회는 신부의 축성의 말씀 직후에 제단의 빵과 포도주 성분이 정말로 예수님의 몸으로 변화한다고 주장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로마 교회는 강력하게 이 요소는 참된 하나님이 받으셔야 하는 예배를 받아야 한다고 명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선포합니다.

“누구든지 모든 충성된 자는 카톨릭 교회의 관습이 항상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지극히 거룩한 성사에 보여야 것에 의심을 품어서는 안된다. 또한 그리스도에 의해 먹도록 제정되었다고 해서 숭배를 해서도 안된다.” (바티칸 회의 2: 성체의 신비, 1권 3항 구문 104).

이는 카톨릭 교회의 많은 공식적 가르침 중에 하나입니다. 즉 성체 성분은 하나님께만 합당한 예배를 받아야 하며 사람들은 하나님께만 합당한 예배를 성체 빵에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카톨릭 교회 내에는 밤낮으로 순번을 정해 웨이퍼를 예배하도록 헌신된 수녀들이 있습니다. 또한 경건한 카톨릭 교도들 중에는 이 성분 앞에서 무릎을 꿇고 몇 시간 동안 예배를 하며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서운 사실은 그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장 종교적이고 거룩한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예배하고 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는 무서운 우상 숭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함과 우상 숭배의 결과들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려면 영과 진리 가운데 드려야 합니다. 이러한 참된 예배는 참된 평강과 참된 기독교인의 삶을 가져옵니다. 마지막 만찬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명료하며 분명합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고전 11:24, 26). “취하라, 먹으라”는 것은 “예배하라, 숭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성분을 예배하는 것은 주의 말씀의 약속대로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옵니다. 우상 숭배는 영적 간음입니다. 하나님은 우상 숭배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행세해도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로 간주하십니다 (출 20:5-6). 신자들은 주께서 선포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영과 진리 가운데 참되게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 4:24). 성체 성분을 예배하라고 명하는 것은 우상 숭배입니다. 입으로 먹고 뱃속에 들어가 결국 사라지게 될 것을 예배하라고 강요하는 교리는 엉터리이며 불경건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마땅한 예배를 성체 빵으로 옮겨 놓는 것은 말할 나위없이 무서운 우상 숭배의 죄악인 것입니다.

능력이 성분들로부터 흐른다는 주장

성경의 분명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로마 교회는 성체의 성분들은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고 주장합니다. 더욱이 로마 교회는 능력이 성분 그 자체로부터 효과적으로 흘러 나온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로마 교회는 선포하길, “성체 성사는 우리를 죄로부터 분리한다. 우리가 성체 성사를 통해 받는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를 위해 주신 것’이며 우리가 마시는 피는 ‘죄 사함을 위해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신 것이다” (신조 구문 1393) 라고 합니다. 이 내용은 신부들이 계속 설교하는 내용입니다. 아동 성범죄, 동성애 및 여러 다른 부도덕한 행위로 잡혀 고소당한 많은 신부들은 한 때 “카톨릭의 경건한 신부들”로 인정받던 자들이었습니다. 이는 성체 성사가 사람을 죄로부터 분리시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오히려 성체 성사는 사실 육체와 마음의 죄악들에 더욱 빠져드는 사람들에게도 자신들을 영적이라고 오해하도록 만드는 끔찍한 거짓 착각을 갖게 합니다. 주님을 증거하도록 주어진 빵과 포도주에 어떤 신비한 능력이 흐르는 것으로 주장하려는 시도는 미신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영광과 엄위 가운데 하나님 아버지의 오른 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보다는 물리적인 형태의 빵에 소망을 갖게 하는 거짓입니다.

마찬가지로, 로마 교회는 “성체”에 대해 가르치기를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똑 같은 은혜에 의해, 성체 성사는 우리를 미래의 치명적인 죄악으로부터 보전한다” (신조 구문 1395)라고 합니다. 여기서 로마 교회는 그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받는 수단으로서 물질적인 것을 바라 보도록 가르칩니다. 즉, 물질적인 것들이 마치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바라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는 것으로써 영원한 저주 아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갈 1:9). 그리스도의 육체 덩어리를 입으로 먹어 소화한다는 생각도 끔찍하지만 그와 관련한 가르침은 더욱 악합니다. 바티칸은 성체는 “미래의 치명적인 죄악으로부터 우리를 보전한다”고 선포합니다. 이러한 인간적인 철학의 유혹적인 언급은 생명을 얻기 위해 물질적인 재료를 의지하던 과거 오랜 풍습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교훈이 더욱 혐오스러운 이유는 치명적인 죄로부터의 보전을 가르치는 그 가르침 자체가 신성 모독이라는데 있습니다.

주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를 이기는 수단을 주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주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참된 신자는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를 인격적으로 바라봄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죄로부터 보호를 받게 됩니다.

신자들에게 양식과 음료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요한 복음 6장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6장의 주제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의하면 신자의 영적인 욕구는 “썩을 양식”이 아니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요 6:27)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요 6:28)라고 물었을 때, 주님의 대답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답변은 그 다음에 나눌 내용을 위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보낸 주님을 믿는 것이 주께서 선포하시는 진리의 핵심인 것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요 6:63). 주님의 이 말씀은 물질적이거나 문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되고 영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영적인 갈증을 주님을 믿는 것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 6:35).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요 6:40).

그 후 주님은 이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해 주님의 육체를 주시겠다고 설명하십니다.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요 6:51).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존재이며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의 몸을 준다는 것은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것으로서 자기 생명을 자발적으로 내려 놓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의 희생을 믿어야 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임을 강조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 6:53).

이 내용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말합니다. 이 사실은 참으로 심각한 내용으로서 만일 어떤 사람이 십자가 상의 주님의 희생을 믿지 않으면 그는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주님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의 모든 유익, 즉  죄 사함, 하나님께 받아들여짐, 하나님의 양자 됨,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감, 영생 등을 다 이루셨습니다. 이를 믿음으로 받는 것을 주님은 주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주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은 믿음으로 주님과 완전하게 일치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주님의 희생적 죽음을 믿음으로 붙들어야 합니다. “먹는 것”은 “믿는 것”과 같은 뜻이며 주께서 선포하신 핵심 주제를 확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요 6:47)고 요약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영혼들에게 양식과 음료입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 안에는 우리의 영혼을 든든히 채우고 만족시키는 진정한 양식과 음료가 있습니다. 주님은 참으로 그분 안에는 참된 공급과 만족이 있다고 말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을 채우고 소생케 하는 참된 양식과 음료인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요 6:56-57). 이 내용에서는 신자의 영혼에 임하는 은혜가 신체의 활동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유적 언어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더욱 이해하기 쉽게 만듭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주님의 이 말씀을 오해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이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 그들은 오해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의견으로 다투면서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요 6:52)라고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보았으며 주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카톨릭 교도들은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오해하여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의 살과 신체를 먹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화체설을 주장하는 교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이 교리는 구원을 위해 주님만을 믿어야 할 필요를 말하는 주님의 근본적인 메시지와 상충됩니다. 말씀 속의 비유는 신성하며 놀라우리 만큼 중요하고 간단합니다. 즉, “먹으라”는 것입니다. 먹는 것은 극도로 개인적인 행동입니다. 아무도 당신을 위해 이 일을 해 줄 수 없습니다. 당신이 생명의 떡을 개인적으로 먹지 않으면 주님은 당신에게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습니다. 반대로, “누구든지 이 떡을 먹으면 그는 영생하게 됩니다” (요 6:51). 어떤 죄인이 자신은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리스도가 없이는 자신은 영원히 멸망할 것을 알게 될 때 그는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만을 신속하고 반갑게 믿을 것입니다.

희생 제사로 주장되는 성체 성사

카톨릭 교회는 성체는 희생 제사라고 주장합니다. 카톨릭 교회는 공식적으로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의 희생과 성체의 희생은 하나의 같은 희생이다. ‘희생양은 하나이며 같다. 신부의 사역을 통해 드려지는 그분은 십자가 상에서 자신을 드린 그분과 같은 분이다. 오직 드려지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 ‘미사에서 거행되는 이 신적인 희생 제사에서는 십자가 제단에서 피 흘리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리셨던 똑 같은 그리스도가 계시며 피 없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리신다. … 이 희생 제사는 참된 화목 제물이다.” (신조 구문 1367).

따라서 카톨릭 교회는 성체 성사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지 않는 방식으로 제물로 드려진다고 단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희생은 구약에서 매일 드려졌던 희생과는 달리 단 한번 드려진 것이라고 합니다.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히 9:25-26). 우리는 주님의 한 번의 희생 제사로 단번에 드려졌다는 사실에서 신적인  완전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하나의 희생 제물로 단번에 드려진 희생 제사를 다시 재연시키려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붕괴시키려는 시도입니다.

둘째, 카톨릭 신부가 자신들이 불멸의 완전한 희생 제물이 되신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희생 제물로 드릴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지극히 교만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을 드릴 자격이 있으셨습니다. 그분만이 성령께서 가르치시듯 유일하고 완벽한 자격이 되셨습니다.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 (히 7:26).

셋째, 로마 교회의 주장은 그리스도가 “피 없는 방식으로 드려진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희생 제물과 고통을 동일시합니다. 피 흘리는 희생 제물을 드림은 고난과 같은 것입니다. 이 진리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 9:22)라는 완벽한 원칙으로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맥락에서 피 없는 제사를 제시하는 것은 언어상 모순이 됩니다. 피 없는 희생 제사는 속이려는 목적 외에는 다른 목적이 없는 전혀 말 같지 않은 모순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의 유일성과 단회성은 단번에 드린 하나의 희생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단번에’ 라는 개념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신약에서 이를 여러 번 강조하십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의 완전함은 구약의 매일 드리는 희생 제사와 대조됩니다.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의 우월성의 진리는 ‘단번’이라는 단어에서 조명됩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롬 6:10)라고 말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베드로도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벧전 3:18)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똑 같은 진리가 히브리서에서만 5번 이상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히 9:28). 이 장엄한 진리는 십자가 상에서의 주님의 선포에서 발견됩니다. “다 이루었다” (요 19:30).

마무리를 지으며

성체가 주의 신체적 몸을 담고 있으며, 주의 희생을 다시 드리는 것이라는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은 주님을 대항하는 완벽한 신성모독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기억하고 주의 완벽하게 마무리된 단번의 희생 제사를 기억하도록 주의 만찬을 제정하셨습니다. 사람을 죄로부터 분리하기 위해 성체 성사를 의지하게 하고 성체 성사를 갈보리의 희생과 같은 것으로 여기게 하는 것은 영혼을 멸망시키는 것이며 완전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한 신성 모독입니다. 그 반대로 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의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의”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 가운데 있는 구원에 필요한 “의”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그를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 4:24). 성령과 관련한 주님의 약속은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 16:8)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성령에 의해 죄를 책망 받게 되면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파멸 상태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믿을 준비가 됩니다. 그는 자신이 허물과 죄악으로 영적으로 죽었다는 것을 깨닫고 따라서 그리스도 밖에는 아무런 구원의 소망이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가 “그리스도로부터”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모든 것을 요약하면 한 단어로 “은혜”입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 1:16). 성령이 여러분을 가르치실 때 하나님께 여러분의 진실한 믿음을 표시하십시오. 그후 여러분이 그리스도만을 믿을 때, 여러분은 영생이신 그분께 연합되었다는 것을 참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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