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절대 권위라는 주제에 대해 나는 천주교 중심부 내에서 어떤 문제와 의심이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지난 여러 해 동안 나도 이 주제에 대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은 최종 권위이며 구원하는 믿음을 위한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바탕이다. 그러므로 구원과 성경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 주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을 의지하는 자들은 주께서 약속하신 것들을 받게 될 것을 확신할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히 11:1). 성경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객관적인 바탕이다. 성경의 믿을만한 권위에 근거해서 믿는 믿음은 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에게 약속하신 바들을 다 이루실 것을 기대한다. “우리가 믿고 확신합니다(알았사옵나이다)” (요 6:69). 이와 같이 성경과 참된 믿음은 뚜렷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기록된 말씀은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바울이 한 말을 상기해 보라.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전 13:6).
진리와 성경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대제사장적인 기도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리를 선언하셨다. 주님은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 17:17)라고 기도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를 포함할 뿐만 아니라 또한 진리 그 자체이다. 이 말씀은 성령이 구약을 통해 끊임없이 선포하셨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계시는 진리”라는 선언과 일관된다. 주님은 친히 기록된 말씀과 진리를 동일시하셨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는 언급은 기록된 성경 외의 다른 자료에 적용될 수 없다. 오직 성경만이 믿는 자의 진리의 기준이다.
신약 성경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 및 주의 사도들이 최종 권위로 언급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 밖에 없다. 광야에서 3번의 시험을 받으실 때도, 주 예수님은 “기록된 바”라고 말씀하시며 사탄을 물리치셨다 (마 4:4, 7, 10). 주님은 “기록된 바”라고 말씀하시면서 기록된 말씀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받아드리시는 것을 보이셨다. 또한 주께서 마태복음 5:17-18절에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라고 말씀하심으로 더욱 기록된 말씀의 권위를 분명하게 하셨다.
성경 외 다른 권위를 정죄하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권위에 둘 때 그들을 질책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자신들의 전통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한 위치에 둠으로써 진리의 기반 자체를 부패시키려는 것을 보시고 매우 엄하게 질책하셨다. 주님계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다”고 선언하셨다 (막 7:13).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전통들은 학식있는 종교 선생들에 의해 오랜 세월을 걸치며 발전된 종교 행위 및 믿음의 교훈들과 규정들, 그리고 규칙들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전통들은 구전을 통해서 그리고 계속적인 취사 선택의 편집 과정을 통해 세월을 걸쳐 이어져 내려왔다. 구전이든 아니면 기록된 것이든 이러한 전통들은 문화적 공동체를 이루게 되면서 종교 생활의 지침 및 공식적인 해석 기준이 되었다. 심지어 성경의 자명한 교훈마저 전통에 의해 여과되더니 사람들의 기호와 입맛에 맞게 변경되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두개인들의 오류를 반박하시면서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마 22:29)라고 선언하셨다.
성만이 영감된 것이기 때문에 성경만이 궁극적인 권위이다. 성경만이 모든 인간의 전통과 생각에 대한 최종 판결을 내린다. 주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잠 30:5)라고 가르친다. 그 다음 구절에서 이런 명령을 한다. “너는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잠 30:6). 이 가르침과 명령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더럽혀지지 않고 순전함을 강조하고 있다. 진리는 이것이다. – 하나님만이 그분의 기록된 말씀에 영감을 불어 넣으시며, 오직 주의 기록된 말씀만이 믿음의 유일한 규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것이 믿음의 규정이 될 수 없다. 성경에 상반되는 어떤 교회든지, 또는 믿음의 삶에 있어서 성경의 위치를 열등한 자리에 두려는 교회는 기만으로 속이는 거짓 교회라고 생각하는 것이 안전하다. 그러한 교회는 하나님을 보좌에서 몰아내고 교회 자체가 절대 권위를 차지하려고 할 것이다.
“오직 성경”
시내 산에서 십계명이 주어진 이래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주의 손가락으로 돌판에 쓰셨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은 이 세상에 존재하여왔다. “오직 성경”이라는 용어는 라틴어로서 “성경만으로”라는 뜻이다. 이 용어는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언급이다”라는 의미를 줄인 것이다. “경에 일렀으되”라는 표현은 듣고 말한 것이 아니라 기록된 성경 내용을 그대로 가져왔다는 뜻이다. 기록된 것을 믿으라는 명령은 오직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만을 받아야 함을 말한다. 이는 다른 모든 자료들로부터 사람이 믿어야 할 진리를 구별해 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명령은 하나님의 불변의 진리가 달린 명령이며 사람에게 있어서는 확신이 달려있는 문제다. 잠언 22:21절은 기록된 말씀은 “네가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한다고 말한다. 불멸의 영혼들의 구원의 확신은 반드시 필요하다.
성경에서 마지막으로 주어진 명령을 보면, 하나님께서 단호하게 아무도 주의 기록된 말씀에 더하거나 감해서는 안된다고 명하신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계 22:18-19).
해석 원칙: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
“오직 성경”의 원칙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진리의 말씀은 또한 성경에 의해 해석되어야 한다는 방법과 일관된다. 이에 대해 시편 36:9절은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라고 설명한다.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의 빛 안에서 보인다. 사도 바울도 이와 똑 같은 말을 한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고전 2:13). 이 내용은 정확하게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의 빛 안에서 보인다는 뜻이다. 성경은 성경 자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한 규정을 마련한다. 성령의 감동 하에 있던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벧후 1:20-21). 베드로가 분명하게 한 것은 성경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성경 해석의 기원도 성경 그 자체의 기원과 똑같은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성령의 빛에 의해서만 성경은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성령은 주님의 소유된 백성들이 성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신다. 성령은 이 일을 성경에 의해 하시기 때문에 같은 원칙이 적용된다. 즉, 성경 그 자체는 성경의 진리를 해석하는 법칙이다.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요일 5:6).
주님께만 참으로 진실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성경에만 충성하며 주의 명령을 순종한다.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잠 1:23). 가장 중요한 이 문제에 있어서 진리를 갈망하는 자는 시편 51:17절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주 하나님은 멸시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가장 근본적인 진리들을 알려주실 것이다. 이에 대해 사도 요한은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요 21:24)라고 하였다. 사도 요한의 이 글은 베드로 및 바울과 마찬가지로 사도 요한이 이 글을 쓴 이유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은 주의 백성들이 주의 증거는 참되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다.
성경의 충분성과 분명함
사도 바울은 성경의 완전한 충분성을 선포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딤후 3:16-17). 최종 진리와 권위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성경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적-문법적 해석을 하도록 그 자체의 영적 해석 법칙을 갖고 있다. 의미가 명백한 성경의 부분들은 처음에 애매해 보이는 성경의 다른 부분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성령이 믿는 자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성도들은 기도 및 부지런한 비교 연구를 통해 복음의 지식과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성령의 조명하시는 사역 아래서 성경과 성경을 비교함으로써 마음이 새롭게 된 성경 독자들은 상상이나, 자기-중심적 해석이나, 신비적 속임수, 종교적 광신, 사교적 이단에 빠질 위험으로부터 보호된다. 성령에 의해 중생되지 않고 성경이 내주하시지 않는 자연인의 이해는 어두워져 있으며, 오직 어두워진 이성이 그들을 인도할 뿐이다. 그들에 대해 성경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고 말한다.
성경은 매우 쉽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어린이라도 성경을 읽고 들으면서 참된 구원의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라고 썼다. 성경의 많은 부분이 그 내용이 매우 쉽고 분명하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3: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성경처럼, 이 구절의 의미도 분명하며 말하려는 요점이 있다.
“성경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주장
전통의 권위를 정당하게 하기 위한 시도로서 요한복음의 마지막 구절을 종종 언급한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요 21:25). 물론 주님이 하신 다른 많은 말씀과 행동들 중에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께서 주의 백성에게 주신 가장 권위있는 기록이다. 우리는 신약 성경에 기록된 주님의 권위있는 말씀 외에 다른 곳에 기록된 주의 말씀은 한 문장도 없다. 성령께서 인정하시지 않은 전통의 권위를 의지하는 것은 헛되다. 주님과 관련되 사건 및 하신 말씀이 어떤 방법이던 구전을 통해 내려왔다는 생각은 사실이 아니다. 언어의 변화 무쌍과 말로 하는 대화의 덧없음과 인간의 기억의 불안정을 고려할 때 그런 주장은 우스꽝스럽다. 사람의 전통을 믿는다는 것은 미신을 믿으려는 어리석음과 비논리적인 주장을 고집하는 것과 같다. 성경은 요한이 복음을 쓰고 있을 당시에도 이미 잘못된 전통이 흘러 다니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요한은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라고 말하면서 잘못된 전통을 부인한다. 주께서 요한이 죽기 전에 재림하실 것이라는 소문은 기록된 진리의 말씀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요한 당시에 그 거짓 소문은 교회에 흘러다니고 있었다.
초대 교회와 신약 성경
카톨릭 교회는 전통을 합리화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하는데 그 노력 중에는 초대 교회 때는 신약 성경이 없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이미 사도 바울의 글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5-16). 베드로는 또한 그가 글을 쓰는 이유는 성도들이 베드로가 전에 말했던 것들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벧후 1:12).
교회의 가장 초기 때부터 신약 성경의 주요 부분은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 주의 영감 하에서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가 그 편지를 처음에 받는 교회들 뿐만 아니라 다른 교회에서도 읽히도록 명하였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은 사도가 살아 있는 동안에 유통되고 있었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기록된 말씀을 믿으라는 주님의 명령은 언제나 신자들이 순종하여왔던 내용이다. 이 점에서 있어서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고전 4:6).
초대 교회는 신약 성경이 없었기 때문에 전통이 필요하다는 얼토당토않은 논리는 초대 교회를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두 가지의 간단한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신약 성경의 정경이 완성되기 전에는 사도들이 실제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주님의 권위를 부여 받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명을 받은 대사들로써 활동했다. 이러한 과도기에도 사도들은 구약으로부터 복음을 전파하는데 어려움이 없었으며 믿음과 도덕의 문제에 있어서 권위적인 지침으로 구약 성경을 사용했다 (참조, 행 17:2-18, 28:23; 갈 3:8; 롬 9:17). 신약 성경의 글들은 마지막 사도가 그의 일을 마쳤을 때 성경의 정경으로 합쳐지고 받아들여졌다. 기록된 계시인 성경은 구원에 대한 마지막 예언의 말씀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졌기 때문에 마무리되었다.
신자의 하나님 사랑에 대한 규정
신자는 그리스도의 하신 말씀을 전적으로 믿지 않으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이는 다시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요 14:23, 24). 또한 예수님께서는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마 24:35)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이 세상에서 살면서 주님은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것이 최고의 목표였던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권위를 의지하고 성경의 인도하심을 따랐다. 주님은 구약의 메시지에 대해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한다”(시 19:7)라고 확증하셨다.
신자는 주께서 기록된 말씀에 대해서만 “주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말씀하신 그대로 따라야 한다. 모든 참된 제자들은 어떤 것이 진리인지 거짓인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지 불쾌하게 하는지를 판단할 절대 기준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과거에 그 기준은 “신앙의 규칙” 또는 “믿음의 기초”라고 불렸으며 그 기준에 의해 진리를 알 수 있었다. 이 원칙은 구약과 신약에서 확연하게 나타나는데, 바로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 그 자체가 진리의 기초인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섬긴다고 하면서 주님에 의해 그리고 주님 안에 있는 아버지의 말씀의 규정을 거절한다는 것을 불가능하다. 반(anti)-성경적 “간이점”경건이라는 것은 안전한 항구를 발견할 수 없다. 정확한 선택을 해야 한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주의 말씀만을 사랑해야 한다. 주의 말씀에 사람의 말들을 추가해서는 안된다. 당신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주의 말씀을 무시할 수는 없다.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참된 사랑을 하는 사람의 증거는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사 66:2)라고 말한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가진 권위의 원천
나는 이제 무거운 마음으로 카톨릭 교회의 권위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말하고자 한다. 과거 오랜 기간 동안 마찬가지로 나도 카톨릭 교회의 교리에 따라 그대로 남녀 노소를 가르쳐왔다.
카톨릭 교회는 그들의 교리에 대한 교회의 확신이 어디서 왔는지 터놓고 말한다. 교회는 공식적으로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결과적으로, 가톨릭 교회에 계시의 전달과 해석이 위임되어 있으며, 가톨릭 교회는 모든 계시된 진리들에 대한 교회의 확실성을 거룩한 성경에서만 가져오지 않는다. 성경과 전통, 이 둘은 동등한 헌신과 경외함으로 귀하게 여겨지고 받아들여져야 한다.” [1]
이 언급은 성경의 충분성을 공식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며 성경 권위의 유일성, 즉 성경만이 주의 모든 피조물 위에 모든 도덕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진리를 거부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교회가 스스로를 기독교라고 하면서 전통과 성경을 똑같이 동시에 사랑한다고 한다면 이는 그 교회는 성경을 아무 소용이 없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마치 어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동시에 그의 비서를 동등하게 사랑한다고 선포하는 것과 같다. 그러한 사랑은 간음이다. 마찬가지로 바티칸의 교회 전통을 향한 “동등한 헌신과 경외”는 영적 간음인 것이다.. 전통을 향한 이러한 “동등한 헌신과 경외”는 성경을 최종 권위로 인정하지 않고 성경에 충성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카톨릭 내에서 전통의 우월한 위치
절대 권위의 가장 주된 특성은 자체 통치라는 점이다. 믿음의 삶에는 주권적인 권위가 있어야 한다. 만일 두개의 권위가 믿음을 다스리면 그 믿음은 마땅히 실패하게 된다. 그 이유는 두 개의 권위가 서로 주관하려 하기 때문이다. 성경과 전통에 똑같은 “헌신과 경외”를 요구하는 바티칸의 부당한 주장은 오웰의 그 유명한 동물 농장 내의 권위 원칙과 똑같은 교회 원칙에 따른 것이다. 즉, 동물 농장을 보면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고 선포되지만, 어떤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우수한 자격을 가진다. 바티칸에 있어서 전통은 언제나 권위에 대한 문제들을 투표로 결정하는 “공의회 ”이다. 이것이 로마 교회가 존재하는 방법이며 게속 이 규정은 지켜져야 한다. 예를 들어, “믿음의 고백”이라고 불리는 트렌트 공의회에서는 복종에 대한 법을 다음과 같이 내렸다.
“나는 사도적이며 교회적인 전통들, 그리고 같은 교회의 다른 모든 규례와 제도들을 확고하게 인정하고 수용한다. 마찬자지로 나는 거룩한 교회 어머니가 붙들어 왔고 붙들고 있는 감각, 즉 교회가 성경의 의미와 해석을 판단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성경을 받아들인다. 나는 신부들의 만장일치를 얻지 못한 내용이나 해석은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2]
따라서 신앙의 규칙 또는 권위의 자리는 로마의 권력층이 꼭 쥐고 있다. 그 권력층을 구성하는 사람들이 바로 “거룩한 교회 어머니(holy Mother Church)”다. 그들은 성경 위에 앉아 판단을 하며, 따라서 결국은 카톨릭 사람들로 하여금 전능하신 하나님과 주의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 거룩한 교회 어머니와 그 전통을 믿도록 만든다. 이러한 사상이 “카톨릭 신자들”의 머리 속에 쇠뇌된다.
어떻게 거룩한 교회 어머니가 통치를 하는지 『카톨릭 교회 교리 문답』에 잘 나와있다. “자녀들을 말을 하고 이해하고 교통하도록 가르치는 어머니로서 교회 어머니는 우리에게 믿음의 삶과 이해를 소개하기 위해서 믿음의 언어를 가르친다.”[3] 그러나 성경이 완전한 구세주로 선포하는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에 있어서 교회 어머니의 권위적 가르침은 영혼들의 눈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보게 하기 보다는 어머니의 보살핌을 의지하게 한다.
“‘믿는다’는 것은 교회적 차원의 행위이다. 교회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보다 앞서며, 우리의 믿음을 만들어내고 지지하고 양육한다. 교회는 모든 신자의 어머니다.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 [4]
주 예수 그리스도는 주의 자녀들을 실족시키는 자들과 또한 그들에게 의도적인 죄를 범하는 자들에게 경고하셨다.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막 9:42).
그렇다면 “성경과 전통, 이 둘은 동등한 헌신과 경외함으로 귀하게 여겨지고 받아들여져야 한다” 라고 가르치는 교회 시스템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교황의 주권 주장
카톨릭 내에서는 절대 진리를 위한 기반이 성경의 하나님의 무한한 권위가 아니다. 오히려 로마 교황,한 사람의 권위가 절대 진리의 절대 권위다. 궁극적인 권위는 집권하는 교황의 결정과 칙령에 있다. 이 사실은 카톨릭 공식 문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바티칸 교회 법전(Vatican canon law)은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최고 권위의 교황은 그의 직분과 관련해서 절대 오류가 없는 가르침의 권위를 소유한다. 그는 모든 신자들의 최고 목자이며 선생이시다. 교황이 명백한 행위로 선포하는 것은, 믿음의 교리이던, 도덕에 관한 교리이던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5]
교회법전 752항은 절대 오류가 없는 가르침의 권위에 대한 “기독교 신자”의 마땅한 반응에 대해 말한다. “믿음으로 동의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교황의 가르침에 대해서 지적으로 그리고 의지적으로 종교적인 존경을 표해야 한다.” 교회법전 333항 단원 3에서는 절대 무류의 전체주의적인 강요에 대항하는 탄원은 잠잠해져야 할 것을 명한다. “교황의 결정과 칙령에 반대하는 청원이나 청구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절대 무류는 하나님의 속성이지 사람이나 사람의 단체의 속성이 될 수 없다. 영원, 전지, 절대 무류는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있는 것이며 하나님만이 소유하실 수 있는 것으로서 피조물에게 전달되거나 위임될 수 없다. 하나님은 스스로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고 선포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사 43:10)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절대 무류의 가르침의 권위”를 교황이 소유하고 있다는 주장은 근본적으로 교황은 신이라는 주장과 같다. 심지어 바티칸의 교리는 이러한 주장을 더욱 부추기는데, 교황은 “거룩한 아버지”이며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것이다. 절대 무류의 주장보다 교황의 교만을 더 드러내는 것은 없을 것이다. 교황은 자신을 최고의 자리에 올려 놓으면서 사실 하나님의 절대 권위를 부인하였다!
역사적 사건들과 모순되는 절대 무류 주장
인간이 하나님처럼 무류할 수 있다는 주장은 상상을 초월한다. 하나님의 속성인 무류를 고집하는 로마 교회는 하나님과 주의 진리를 조롱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건들과 모순된다. 교황 호노리우스(625-638)는 제 6차 공의회 (서기 680-681 년)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 받았다. 그는 또한 11세기까지 다른 많은 교황들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교황 레오 2세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 받았다. 즉, ‘무류’한 교황을 다른 ‘무류’한 교황들이 이단으로 정죄를 하였던 것이다. 심지어 어떤 교황은 자신이 교황직에 있을 때 교황직의 무류를 부인하였다. 카톨릭 역사가 어거스트 버나드 해슬러는 “그러나 교황 요한 12세는 자기 자신의 무류를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았는데 그는 오히려 교황직의 무류를 주권적인 교황의 권위에 부적절한 제약을 두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1324년의 법령 “퀴이 쿼런담(Qui Quorumdam, 요약)”을 통해 프란시스칸의 교황 무오설은 마귀의 역사라고 정죄하였다.[6] 바티칸의 무오설 주장은 주님의 명령에 의해 무너진다. “나는 …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출 20:2-3). 표현은 다르더라도 로마 교회가 주장하는 또 다른 무류 주장에는 교회의 전통이 신적으로 영감되어 있다는 선언이 있다.
전통은 신성하다고 주장하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형식과 예식과 성사들을 유지하기 위해 로마 카톨릭은 공식적으로 교회의 전통은 신성하다고 언급한다.
“그렇다면 신성한 전통과 신성한 성경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통한다. 이 둘로부터 똑 같은 신적인 샘이 흐르며, 같은 형태 안에서 하나를 형성하기 위해 함께 가며 같은 목적을 향해 움직인다.”[7]
로마 교회는 신성한 전통이 신성한 성경과 같은 원천을 갖고 신성한 성경과 함께 하나를 형성한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신성한 전통은 전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다고 주장한다. 교회의 선포는 다음과 같다.
“신성한 성경은 성령의 호흡 하에 글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이다. 거룩한 전통은 전부 주 그리스도와 성령에 의해 사도들에게 위탁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다. 교회의 전통은 사도들의 후계자들에게 전달되며 따라서 후계자들은 진리의 성령의 조명을 받아 그들의 설교를 통해 그 전통을 충성스럽게 보존하고 설명하고 널리 전파해야 한다.”[8]
이런 가르침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주의 거룩한 말씀에 대항하는 신성모독이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그 무엇과도 섞여서는 안되다고 경고한다. 만일 섞이면 저주 밖에 남는 것이 없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계 22:18).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시길, “성경은 폐하지(나뉠 수) 못하나니”(요 10:35)라고 하셨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렘 23:29). 그러므로 “거룩한 전통은 전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다”는 카톨릭의 주장은 말 그대로 성령에 대항하는 신성모독죄이다. 성령은 친히 주의 말씀을 신자들에게 전달하십다. 성령께서 우상 숭배와, 미신과 강령술을 지지하는 불결한 전통을 전달하실리 만무하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사 55:11).
주님만이 진리의 영이신 것처럼 하나님의 영은 성도들의 마음에 참된 믿음을 봉인하신다. 기록된 말씀 안에서 모든 신자들을 향한 성령의 증거는 성령 자신의 신적인 빛과 효력과 능력에 의해 이루어진다. 성령께서 친히 자신의 빛과 권위로 성경을 증거하신다는 것은 성경의 기원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성령께서는 주의 말씀을 신자들에게 가져오신다.
카톨릭 보고에서 사용되는 전통
“거룩한 전통은 전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다”는 바티칸의 선언은 성령을 모독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성령이 아니라 전통을 의지하도록 인도한다. 로마 교회의 최근 교리 문답 구문 113의 첫 부분에는 이탈릭 체를 사용하여 “’모든 교회의 살아있는 전통’ 내에서 성경을 읽으라”라고 기록함으로 이 점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또한 로마 교회는 교회가 선언한 내용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을 향해 꾸짖는다. “교회의 전통 및 최고 교도권에서 벗어나 성경을 읽거나 성경을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9] “전통 및 최고 교도권”안에 있는 로마 교회는 순교자들의 유품으로 알려진 것들을 향한 숭배, 희생 제사의 제단을 세움, 향을 태움, 형상과 신전을 거룩하게 여김, 성자들에게 기도와 찬미를 드리는 일 등을 허용한다. 따라서 로마 교회는 성령의 직접적인 인도하심과 가르침을 제거하고 거짓 예배를 가르치며 실행하고 있다. 바티칸의 교훈은 문자 그대로 주님의 말씀에 있는 것처럼 영혼을 멸망시키고 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눅 11:52).
사도 바울은 신자들에게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라”(고전 2:4-5)고 당부한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일마다 신선한 만나가 공급된 것처럼, 하나님의 성령은 의를 향해 주리고 목마른 자들에게 성경으로 매일 새롭게 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참된 신자들은 카톨릭 신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인도하여 사람이 말이 아닌 성경으로 이끌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말씀하신 그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전통을 지지하는 사도직 계승 주장
“사도적 전통”이라는 제목 하에 “사도직 계승”이라는 부제목이 붙은 교리 문답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풍성하고 살아있는 복음이 언제나 교회 내에 보존되도록 하기 위해 사도들은 주교들을 그들의 계승자로 남기셨다. 그들은 주교들에게 “자신들의 교도권”을 넘겨주었다. 따라서 참으로, 영감된 책들 안에 특별한 방법으로 표현된 사도적 가르침은 세상 끝까지 계속 계승됨으로써 보존되게 되었다. 성령 안에서 성취된 살아있는 이 전승(transmission)을 전통이라 부르는데, 이는 성경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성경과 구별된다.”[10]
성경 어디에도 “연속적인 계승”(결국 “사도 계승”이 됨)을 언급하는 곳이 없다. 신약 성경을 보면 사도들은 가룟 유다가 죽은 후에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세운 것 외에는 다른 사도들을 세운 적이 없다. 대신 그들은 장로와 집사를 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교회는 사도직을 계승 받았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입장을 변호한다.[11] 그러나 만일 참된 “사도 계승”의 개념을 사용한다면 그 계승자들은 하나님의 집의 성도들이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엡 2:20). 만일 성경이 말하는 이러한 교리적인 바탕이 무너진 교인이라면 그 교인은 사도적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배교한 사람이 된다. 사도적 교리가 없는 “사도 계승”은 사기다. 오직 성경적인 교훈만이 우리를 인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
성령 모독죄
절대 권위에 대한 카톨릭 교회의 교리를 정직하게 살펴보면 결과적으로 그들의 주장은 참된 성경적 바탕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주의 기록된 말씀 안에 있는 주 하나님의 신적 권위를 완전히 찬탈하려는 시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적 용어로 “거룩한 교회 어머니”는 엄격하게 말해서 거룩하지도 않으며 실제로 “교회”도 아니다. 오히려 로마 교회는 로마 제국의 자명한 계승이다. 로마 제국의 정신과 특징이 그대로 로마 교회의 법령과 전통들과 이방 관습에 그대로 새겨져 있다. (이 부분은 제 4과에서 더 상세히 다루어진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과 똑같이 교회의 전통을 거룩하고 귀중하다고 승인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교황 무류 주장을 건방지게 하는 것과 똑같이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부분에 있어서는 바티칸과 그리스도의 신부 사이에 그 어떤 타협이나 협정이나 연합이 절대로 있어서는 안된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가졌던 “성전 중독”은 자신들은 옳고 바르고 거룩한 것으로 착각하게 하였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그들의 가르침과 시스템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이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한” (마 23:27) 사실을 증명하셨다. 마찬가지로 자신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주둥이라고 주장하는 로마 교회의 시스템의 교만한 특권들과 주장들은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으로 드러난다.
참된 교회의 “인도자시며 위로자”이신 성령께서는 이 모든 것을 미리 보시고 로마 교회의 조작된 권위 바탕과 그들의 위험스러운 널려 깔린 미혹의 시스템에 대항할 수 있는 신적인 답변을 주셨다. 그 답변은 바로 하나님 자신으로서 그분은 주의 손가락으로 친히 말씀을 기록하기 시작하셔서 마지막 때에는 “그의 아들로”(히 1:2) 말씀하셨다. 알파와 오메가시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은 구약 성경의 글들을 진리로 인정하셨으며 또한 신약 성경을 인준하셨고 나아가 사도 요한에게 그의 말씀을 글로 쓰라고 명하셨다.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계 1:11). 따라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뜻이 글로 성도들에게 전달되게 되었다. 성경은 카톨릭 교회의 거짓 교훈을 포함한 모든 혼동과 어둠과 불확실 가운데서 은혜롭고 변함없은 안식처가 된다. 귀하신 주님 안에서 우리는 진리인 성경 안에 있는 보화와 확신으로 인해 하나님을 참으로 찬양하게 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딤후 3:16-17).
믿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구원
성경의 확실성과 구원하는 믿음은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오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즉,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롬 10:17)이다. 믿음은 반드시 그 믿음이 서 있을 수 있는 기반이 있어야 한다. 그 기반은 다름 아닌 조금도 거짓을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마음은 주께서 하신 말씀을 받고 그 말씀에 따라 행해야 한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사람의 영혼에 말씀하신다. 성경은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을 통해서 라고 가르친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롬 3:28). 그러면 어떤 규칙 또는 어떤 힘에 의해 사람이 의롭게 되는가? 성경은 수사적으로 같은 질문을 한다.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롬 3:27). 신자들은 혼동 속에 남겨져 있지 않다. 또한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게 하면서 온전한 확신과 능력을 가져오는 은혜의 역사 또한 믿음의 법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적 확신 가운데 모든 의심을 물리치는 은혜 또한 믿음을 통해 온다. 이러한 은혜는 언제나 자아를 부인하게 하고 하나님을 의뢰하게 한다. 믿음으로, 즉 하나님의 신실함을 의지함으로 사람은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벧전 1:8)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실체에 들어가게 된다.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참이라고 믿고 행동한다. 예를 들어, 가족들의 말이 참이라고 믿고 행동하며, 법정에서 맹세하고 말한 것들이 참이라고 믿는다. 이에 사도 요한은 변론하길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것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9-12) 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믿음은 주님과 사람의 마음을 연결시키는 끈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의가 우리의 것으로 간주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의해 승인된다.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은”(눅 24:25) 어리석은 자들이다. 어리석은 자들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며 전통 같은 뭔가 다른 것을 기록된 말씀과 같은 자리에 둔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성경의 권위와 능력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이러한 어리석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얻지 못하게 한다. 극도로 심각한 것은 교회가 전통과 성경은 하나라고 주장하는 것과 또한 성경을 사랑하는 만큼 교회 전통을 사랑해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주장한다는 사실이다. 만일 로마 카톨릭 교회처럼 그렇게 가르치는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는 구원하는 믿음의 기반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의 확실성과 진리와 타당성을 맛보며 즐거워한다. 사도 바울이 선포하였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 3:15).
성경처럼 그렇게 큰 능력을 가진 책은 없다. 그 어느 것도 성경만큼 사람의 마음과 양심과 생각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히 4:12). 매우 중대한 질문은 당신은 성경의 절대적 신실함을 믿으며 또한 성경이 말하는 주님의 영광을 믿는가 하는 것이다. 만일 믿는다면, 우리는 다 함께 기쁨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전 15:3-4).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딤후 1:12).
[1] 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Second Ed. (United States Catholic Conference, Inc-Libreria Editrice Vaticana, 1997) Para. 82. 특별한 언급이 없으면 이 책의 인용은 이 교리 문답에서 인용한 것이다.
[2] Henry Denzinger, The Sources of Catholic Dogma, Tr. By Roy J Deferrari from Enchiridion Symbolorum, 30소 ed. (St. Louis, MO: B. Herder Book Co., 1957) #995.
[3] Catechism, Para. 171.
[4] Catechism, Para. 181.
[5] Code of Canon Law, Latin-English ed. New English Translation (Canon Law Society of America, 1989) Can. 749. 특별한 언급이 없으면 이 책에서의 모든 교회법전 인용은 이 버전에서 인용한 것이다.
[6] Augustus Bernard Hasler, How the Pope Became Infallible: Pius IX and the Politics of Persuation (Garden City, NY: Doubleday & Co., Inc., 1981), pp. 36, 37. 독일어로 출판된 원서의 정보는 다음과 같다. Wie der Papst Unfehlbar Wurde (Verlag, Munchen: R. Piper & Co., 1979).
[7] Catechism, Para. 80.
[8] Catechism, Para. 81.
[9] “DOMINUS IESUS” Setempber 5 th 2000. http://www.vatican.va/roman_curia/congregations/cfaith/documents/rc_con_cfaith_doc_20000806_dominus-iesus_en.html.
[10] Catechism, Para. 77, 78.
[11]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살아있는 토라”에 그들의 충성을 다짐했다. 그들에게 성경은 마무리된 계시가 아니었다. 그들은 모세로부터 전통을 통해 내려온 산 지식에 충성하였다. 아주 똑같은 방법으로 로마 시스템은 사도 계승을 수단으로 하여 물려 받았다고 하는 “살아있는 전승”을 전통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