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차드 베네트
아일랜드는 매우 특이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로마 군대가 손대지 않은 섬이었으며, 선교사 패트릭이 은혜의 복음을 가져간 섬이 바로 그 섬이었다. 패트릭은 적어도 2대째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패트릭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반네벤 타버니애에 정착한 장로(Presbyter) 포티터스의 아들로서 관리인(집사) 칼프르니우스”[1]였다. 이 사실들은 패트릭이 직접 쓴 믿음의 간증 기록에 남아 있다. 믿을만한 이 문서는 다섯개의 원고로 보관되어 있다. 하나는 7세기의 『알마그의 책』에, 두번째 원고는 10세기의 코튼 도서관에, 세번째 것은 성 베다스투스의 프랑스 수도원에, 그리고 나머지 두개는 솔즈베리의 성당 도서원에 보관되어 있다. 믿을만한 이 문서는 패트릭이 누구이며 그가 어떤 사명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잘 말해준다. 특히 그가 전한 은혜의 복음에 대해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
패트릭은 373년, 지금 스코틀랜드의 부분이 된 로만 브리튼 클라이드 강의 마을에서 태어났다. 16살이 되자 그는 해적 떼에게 잡혀서 지금 북부 아일랜드의 앤트림 카운티에 해당하는 자역의 족장에게 팔렸다. 그는 6년 동안 양떼를 돌보았다. 그의 간증 기록을 보면 “나는 내가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멀리해야 하는지를 깨닫기 전에 포로로 잡혀갔다”[2]라고 적혀있다. 포로로 잡혀 있는 이 기간에 그는 분별없는 삶을 정리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구원의 지식에 이르게 된다.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절감했다. 그의 고백을 들어보자.
“겸손하게 되기 전까지 나는 깊은 웅덩이에 잠긴 돌덩어리가 같았다. 능력의 주께서 내게 오셔서 주의 자비 가운데 나를 일으키셨다. 사실 나를 높이 올리셔서 성벽 높은 곳에 두셨다. 그곳에서 나는 감사함 가운데 사람이 헤아릴 수 없는 주의 위대한 은혜를 이 세상을 향해 외쳐야 했다.”[3]
패트릭은 역사 속의 여러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처럼 그리스도의 은혜의 부요함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자비를 발견했다. 이것이 바로 패트릭의 간증 속에서 계속 울리는 주제다.
“하나님께서 내게 그토록 크신 은혜를 베푸셨으니 나는 하나님께 크게 빚진자이다.”[4]
그후 그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자라게 된다.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요 1:14)하신 주님을 믿으면서 패트릭은 직접 “그(주님)의 충만한 데서 … 은혜 위에 은혜”(요 1:16)를 받았다. 그의 고백을 들어보자.
“점점 하나님의 사랑이 커가면서 주님을 향한 나의 경외함과 믿음은 날로 새롭게 자라났다. 나의 영은 낮이나 밤이나 매번 백번까지 기도를 드릴 정도로 충만해져 있었다. 종종 숲 속이나 산 위에 머물렀으며 새벽에 일어나 차가운 추위 가운데,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기도하기를 좋아했다. 나는 아픔이나 게으름을 느끼지 못했는데 아마 그 당시 내 속에는 성령께서 타오르고 계셨던 것 같다.”[5]
그후 6년 후 패트릭은 그곳에서 도망하여 땅과 바다의 험한 여정 끝에 스코틀랜드의 자기 백성에게 돌아간다. 그의 고백을 들어보자.
“나는 다시 내 친족들이 있는 브리튼에 돌아왔다. 그들은 나를 아들로서 환영했고 믿음 안에서 내게 부탁하기를 그렇게 큰 환난을 지났으니 다시는 그들을 떠나 다른 곳에 가서는 안된다고 하였다.”[6]
주님께로부터 직접 받는 그의 사명
사도 바울처럼 패트릭은 주님으로부터 전에 포로로 잡혀갔던 그 땅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분명한 부르심을 받는다. 주님의 부르심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나는 마치 아일랜드로부터 셀 수 없이 많은 편지를 들고 빅토리커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오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편지의 초두를 읽어 보았다. ‘아이리쉬의 소리.’ 편지의 초반부를 읽는 순간 나는 서해안 근처 포클루트 숲에 사는 사람들의 음성 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우리는 거룩한 청년인 당신이 이곳에 와서 우리와 함께 하기를 부탁합니다.’ 나는 마음이 강하게 찔리면서 더 이상 그 편지들을 읽지 못하고 잠에서 깨어났다.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 이유는 몇년 후 그들의 부르짖음을 주께서 응답하셨기 때문이다.”[7]
패트릭은 어느날 밤에 꿈 속에 다시 자신을 부르시는 사건을 말하면서 그가 어떻게 성경으로 그 사건을 해석하였는지 분명하게 말한다. “마치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 우리를 돕는 것 같았다. 사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성령께서 친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숨결로 우리를 위해 중보해 주셨다.” “우리의 보혜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중보 하신다.” 패트릭은 그의 체험을 이해하기 위해 성경을 의지하였고 그를 부르신 분은 다름 아닌 주님이었음을 확신하였다. 그의 고백을 들어보자. “당신을 위해 생명을 주신 주님, 당신 안에서 말씀하시는 분은 주님이다.”[8] 그는 자기의 죄악을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가 포로로 잡혀 있었던 바로 그 섬으로 선교사로 부르시는 분임을 알게 되었다.
패트릭의 자필로 쓴 두번째 역사적 문서는 그가 코로티쿠스에게 쓴 편지다. 그 편지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의 영광을 위해 그에게 타국으로 가라고 하시며 맡기시는 업무를 설명한다. 그의 자필 내용은 다음과 같다. “따라서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영생의 영광을 위해 타국으로 가게 된 그리스도의 종이다.”[9] 이 내용은 패트릭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그는 자신의 죄인됨을 알고 죄인이 발견할 수 있는 “우리 주 그리스도 안에”[10] 있는 구원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의 간증의 첫째 문장은 “나 패트릭 죄인은 가장 소박한 시골 사람으로써 모든 신자 중에 가장 작은 자요,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혐오스런 자다.” 마찬가지로 그가 코로티커스에 보내는 편지의 첫부분에서도 “나 패트릭 죄인은 못배운 사람으로서 아일랜드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분명히 패트릭은 자신을 죄인으로 보았다. 그는 자신의 내면 안에서 어떤 생명의 불꽃을 본 것이 아니었고, 어떤 종교 예식을 의지한 것도 아니었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였다. 패트릭이 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영생의 영광”이라는 표현은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한 분명한 위로와 용기를 보여준다. 종교 예식을 의지하는 종교와는 전혀 다르게 패트릭의 눈은 주님께 고정되어 있었다. 패트릭이 살던 시대의 카톨릭 및 현재 카톨릭은 여전히 구원을 위해 성사(sacraments)를 의지한다.[11] 그러나 패트릭은 자신을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죄인으로 여겼다. 패트릭의 메시지는, 구원은 전적으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의 메시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로마 카톨릭이 전하는 메시지와 전혀 다르다.
그의 사역의 시작
30세의 기독교 선교사 패트릭은 주 안에서의 몇몇 형제들과 함께 아일랜드를 향해 떠났다. 그는 405년에 아일랜드에 도착했다. 역사적인 이 사실은 실제로 확인된다. 예를 들어, 9세기 초에 생존했던 아이리쉬 감독 마르쿠스는 패트릭이 405년에 아이리쉬에 도착했다고 말한다. 같은 때에 생존했던 네니우스도 이 사건을 언급한다.[12] 그가 아일랜드에 언제 도착하였는지는 대단히 중요한데 그 이유는 여러 세기 후에 교황 첼레스티노가 아일랜드에 팔라디우스라는 선교사를 보내는데 이때 교황은 팔라디우스와 패트릭을 혼동시키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패트릭이 기독교인으로서 성공한 소식이 로마에 알려지자 교황 첼레스티노는 그 곳의 교회들을 교황의 휘하에 두고 싶어서 팔라디우스를 감독으로 보낸다. 그러나 로마로부터 보냄을 받은 팔라디우스가 아일랜드에 등장한 때는 432년이며 이때는 벌써 패트릭이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이곳에 온지 27년 후이다. 아무튼 팔라디우스가 아일랜드에 왔을 때 많은 기독교 교회들이 로마 주교에게 순복하라는 그의 메세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따라서 팔라디우스는 자신의 실패로 인해 대단히 좌절했다. 이 상황에 대한 역사가 필립 샤프의 글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팔라디우스는 매우 좌절했기 때문에 그의 보좌인들과 함께 그곳을 떠나 북 브리튼의 픽트 족들에게 갔으며 그곳에서 죽었다. … 팔리디우스의 로마 사명은 실패했다. 패티릭의 독자적 사명은 성공했다. 패트릭은 아일랜드의 참 사도로서 고향 및 세상으로 퍼져있는 모든 아이리쉬 민족의 기억 속에 지울 수 없는 기억을 남겼다.[13]
60년의 과정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
아일랜드에서의 패트릭과 그의 동반자들의 사역은 극도로 어려웠다. 패트릭은 드루이드 족의 오랜 이방 종교에 대항해야 했다. 사람들은 드루이드 사람들이 영적인 사건에 있어서 그들을 위한 이방 사제들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패트릭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다.
“나는 하나님께 크게 빚진 자이다. 하나님은 내게 큰 은혜를 베푸셔서 나를 통해 많은 백성들이 하나님 안에서 거듭나게 하셨다. 그들의 거듭남이 확인되면 나는 그들을 그 백성들을 위한 성직자로 임명했다. 얼마 후 큰 대중이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이는 주께서 주의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하셨던 것처럼 주께서 친히 사방 땅 끝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을 인도하셨던 것이다. ‘여호와 나의 힘, 나의 요새, 환난날의 피난처시여 민족들이 땅 끝에서 주께 이르러 말하기를 우리 조상들의 계승한 바는 허망하고 거짓되고 무익한 것뿐이라’ (렘 16:19). 또한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행 13:47)라고 하셨다. 나는 복음 안에서 약속된 것처럼 주님의 약속이 완성되기를 원했다.”[14]
이때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자들이 수천명이라고 그는 기록하였다.[15]
패트릭은 또한 염려스러운 여정들, 어려움들, 낙심들에 대해 썼다. 그는 제사장 직을 수행하는 드루이드족의 어둠의 세력과 대항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했으며 사람들에게 죄와 의와 심판을 깨닫게 하시는 영광스러운 성령을 의지하였다. 그는 은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임을 인식했다.
“하나님께서 친히 내게 허락하시지 않으시면 나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주께서 주를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허락하셨던 것처럼 내게 쓴 잔을 허락하실 것에 대해 준비되어 있을 만큼 간절히 주의 도우심을 사모한다. 이 마음을 주께서 알아주시길 구한다. 따라서 주께서는 결단코 이 먼 이국 땅에서 허락하신 주의 백성들로부터 나를 떼어 놓으시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인내를 주시길 기도한다. 주께서 나를 내가 죽는 그 시간까지 주님만을 위한 신실한 증인으로 삼아주시길 기도드린다.”[16]
60년 이상 패트릭은 아일랜드 이곳 저곳을 다 다니며 복음을 전했고 디모데와 디도처럼 장로들을 임명하고 교회를 세웠다. 그가 사역을 마칠 때 아일랜드 전역에 365개의 교회를 세웠다. 이 교회들은 신약의 교회들처럼 목사와 장도들이 섬기던 사람들과 함께 세워졌다. 목사의 권위는 그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한 것이었다. 마치 성경이 알려준 대로 세워진 권위였다. 마찬가지로, 패트릭에 의해 세워진 수도원은 로마 교회 하에 세워진 수도원과는 전적으로 달랐다. 그 수도원들은 마치 보드와 파의 수도원이나 또는 북부 이탈리아와 남부 프랑스의 초창기 교회의 수도원들과 매우 흡사하였다. 그 수도원에서는 사람들이 몇년 동안 따로 있으면서 성경을 훈련 받았고 어떻게하면 다른 사람들을 복음화할 수 있는지를 배웠다. 후에 그들은 결혼을 하여 가족들이 있었다. 이들은 내적 거룩을 위해 세상을 버리고 고립된 그러한 수도승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빛과 생명을 보았던 사람들로서 참된 복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복음화하기를 원하였다. 패트릭이 아일랜드에 세운 이러한 수도원들과 교회들 때문에 아일랜드는 “성도와 학자의 작은 섬”으로 알려졌다.
600년의 열매
패트릭이 귀히 여긴 분명한 복음의 메시지와 또한 그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그가 죽은 후에도 계속 살아 역사했다. 563년에는 패트릭의 선교 사역을 본 받아 스코트랜드로 떠난 유명한 콜롬바와 그의 동료들이 있다. 그후 612년에는 프랑스와 독일을 복음화하기 위해 떠난 콜럼바누스와 그의 동료들이 있다. 킬리안과 그와 동반한 형제들은 680년에 프랑코니아와 뷔르츠부르크로 선교사로 떠났다. 포란난과 그와 함께 한 12명의 형제들은 970년에 벨기에 국경으로 복음을 들고 떠났다.[17]
600년 이상 아일랜드 선교사들은 패트릭이 전한 복음을 들고 브리튼, 독일,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및 여러 나라로 퍼져 나갔다. 9세기와 10세기에는 어둠이 유럽을 덮고 있었다. 중세 암흑 시대가 시작되었고 로마 교회는 음모와 학대를 통해 정권을 잡더니 대부분의 유럽을 손아귀에 넣었다. 그러나 그렇게 어둔 시대 가운데서도 아일랜드 선교사들은 계속 참된 복음의 씨를 퍼뜨렸으며 그 씨는 수세기 동안 모든 유럽에 걸쳐 풍성한 좋은 열매를 맺었다.
패트릭의 유산에 대한 날조
그러나 9세기에 데인 족이 들어오게 되면서 아일랜드의 켈트 교회는 성경적 기반을 잃기 시작했다. 더욱이 교황 로마는 아일랜드를 그 수하에 넣기 위해 군사력을 풀기 시작했다. 이는 교황 아드리안 4세가 1155년 영국 왕 헨리 2세에게 명한 칙령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교황은 아일랜드를 침공하는 것을 공인하였고 헨리를 아일랜드의 왕으로 임관하는 반지를 보내주면서 그 제왕에게 “아일랜드에 퍼진 악들을 뿌리채 뽑으라. …각 집마다 매년 1페니의 세금을 사도 베드로와 성 로마 교회에 바치게 하라”[18]라고 명하였다.
이에 헨리 왕은 1171년 교황권의 계획을 수행했으며 강력한 군사력으로 아일랜드를 완전히 장악했다. 그는 또한 1172년에 열린 캐셜 종교 회의를 통해 모든 대주교와 주교들로부터 아일랜드 왕국은 자신과 그의 후손들에게 속하였음을 확증하는 계약을 받아냈다. 왕은 이 계약 내용을 교황 알렉산더 3세에게 보냈으며 교황은 대주교와 주교들의 편지에 따라 그의 영역을 넓히면서 극도로 만족해 했다. 같은 해 1172년에 교황 알렉산더 3세는 이전 교황 아드리안의 교황 칙령을 확증하는 법령을 포고했다. 로마로부터 추가로 나온 법령들은 헨리 2세 및 아일랜드의 왕자들과 귀족들, 그리고 아일랜드의 주교들에게 사람들과 목사들 위에 집권하는 위계 질서를 세우도록 했다. 따라서 아일랜드와 영국의 모든 백성들이 교황의 권위에 순복하도록 했다.
패트릭의 유산은 살아있다!
패트릭의 심장의 고동과 영혼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있었다. 그는 그의 간증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여러 면에서 부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형제들과 친족들이 나를 알고 또한 내 영혼의 소망을 알기를 바란다. 나는 시편에서 주께서 하신 말씀을 잘 알고 있다.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시 5:6). 마찬가지로 주님은 복음 안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라고 하셨다. 따라서 내가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가장 무서워하는 사실은 그 심판에 날에 그 누구도 빠져나가거나 숨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각 사람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가장 작은 죄악들마저 설명해야 할 것이다.”[19]
패트릭의 이 말은 주님의 예언적인 나팔 소리같다. 한 나라의 백성들로부터 유산을 훔쳐내는 것은 매우 심각한 범죄이다. 특히 그 유산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빛과 생명이라면 그 유산을 사라지게 한 죄악의 크기는 어떠하겠는가! 현재 많은 아일랜드 사람들이 로마 카톨릭의 형식과 예식 가운데 빠져서 자라난다. 그러나 우리 중에 많은 사람들이 죽은 행실로부터 돌아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깊게 취하게 되면서 이제 패트릭의 유산 위에 서기를 원한다. “그 누구도 빠져나가거나 숨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각 사람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가장 작은 죄악들마저 설명해야 할 것이다.” 패트릭처럼 우리의 소원도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한 하나님의 복음을 (엡 1:4) 전세계적으로 출판하는 것이다. 패트릭의 삶의 놀라움은 단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하나님의 은혜였다. 참된 복음으로의 하나님의 부르심은 아일랜드로부터 나와 600년 이상 계속되었다. 패트릭이 드루이드 족의 제사장 직을 이기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바랐던 것처럼 지금 우리도 성경의 복음을 위해 카톨릭 사제직 및 권력 구조 안에 갇힌 사람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 전쟁은 주님께 속해 있으며 승리는 주의 것이 될 것이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눅 12:32). 패트릭의 유산 가운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기도를 따라 기도한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요 17:24). 주님의 무서운 말씀이 인간이 만든 종교 가운데 인생을 보내는 자들의 귀에 울리기를 바란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 사제나 성사를 통해 그리스도를 인식하는 자들은 결단코 주 안에서의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다. 오직 주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만이 아버지와 함께 하게 된다.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너무나 분명하게 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요 6:29).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히 3:7-8).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서 있는 한, 당신의 삶을 향한 주님의 부르심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주님만을 믿으라. 그 이유는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요일 5:11-12)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당신은 패트릭이 흔들림이 없이 섰던 것처럼 당신이 있는 곳에서 굳게 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영원히 서게 될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계 18:4).
[1] The Confession of Patrick, http://irelandnow.com/legends/confession.html, 1/29/03, p. 1.
[2] “가장 권위있는 자료에 의하면 패트릭은 373년에 태어났다. 라니간은 그가 465년 죽었음을 증명하는 증거를 제시했다. (Apud Lanigan, vol. iv. p. 112). 『알마그의 책』은 이를 뒤바침하는 증거를 제시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으로부터 패트릭의 죽음까지는 436년이 지났다.’ 십자가 사건이 서기 30년에 발생했으니 계산하면 그가 죽은 해는 466년이 된다. 가장 믿을만한 권위의 전통 기록들은 그가 스코토-아이리쉬 사람들에게 6년 동안 복음을 전했음을 증거한다.” “St. Patrick: Apostle of Ireland” in History of the Scottish Nation by J.A. Wylie (London: Hamilton, Adams & Co. Andrew Elliot, Edinburgh 1886) Vol. II, Ch 9.
[3] Ibid., p. 2.
[4] Ibid., p. 5.
[5] The Confession of Patrick, p. 2.
[6] The Confession of Patrick, p. 3.
[7] Ibid., p 3.
[8] Ibid., p. 3.
[9] Letter to Coroticus, http://prayerfoundation.org/st_patricks_letter_to_coroticus.htm 1/30/03, p. 2.
[10]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빌 3:8-9).
[11] “교회는 새 언약의 성례는 신자들의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확언한다.” 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Second ed., (United States Catholic Conference, 1997) Para. 1129.
[12] 역사가 와일리는 패트릭이 405년에 선교사로 도착한 사실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여러 인용 중 킬렌 박사의 글을 인용하면서 와일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사건은 모든 교단의 가장 뛰어난 비평가들에 의해 인정되었다.’ 어셔, 웨어, 일레몬트, 라니갠 그리고 니앤더 등이 그들이다. … 킬렌 박사는 패트릭이 405년 9명의 인질 중 한명이던 니앨의 죽음 직후에 아일랜드에 도착한 것으로 생각한다.’” From “St Patrick: Apostle of Ireland” by J.A. Wylie in History of the Scottish Nation, Vol. II, Ch. 13, endnote No. 4.
[13] Philip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 4, Ch. 2, Sect. 14, “The Conversion of Ireland”.
[14] The Confession of Patrick, p. 5.
[15] Ibid., p. 2.
[16] Ibid, p. 8.
[17] 보다 더 많은 정보를 위해 필립 샤프의 글을 보라. Philip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 4, Ch. 2, “Conversion of Northern and Western Barbarians”, Sect. 15, “The Irish Church after St. Patrick. The Missionary Period”.
[18] 교황 아드리안 4세가 헨리 2세에게 낸 기독교인들을 정복하고 굴복시켜 로마에 귀속하게 하라는 칙령의 내용은 다음에서 찾아볼 수 있다. http://www.yale.edu/lawweb/avalon/medieval/bullad.htm 2/1/2003.
[19] The Confession of Patrick, p.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