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도표는 “당신의 말씀은 진리입니다”라고 불립니다. 각 주제들은 중앙에 있고, 왼편은 각 주제에 대한 주님의 진리를 설명하는 성경 구절들입니다. 오른편은 카톨릭 천주교의 공식적인 가르침입니다. 이 도표를 보면 양 쪽의 관점이 분명하게 빛과 어둠처럼 구분되어 있습니다.

카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과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의 진리 사이에는 주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 주제는 “무엇이 진리의 기초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진리를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도표 왼편에 있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절대 기준을 언급하셨습니다.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요 10:35).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다음과 같이 선포하셨습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 17:17). 이 구절들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를 포함할 뿐만 아니라 진리 그 자체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신자가 진리를 알 수 있는 기준입니다. 오직 성경만이 영감된 것이기 때문에, 성경만이 절대 권위를 가집니다. 성경만이 모든 인간의 전통과 사고에 대해 옳고 그름의 최종 판결을 내립니다. 따라서, 주님은 잠언 30:6절에서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너는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의 말씀에 아무 것도 더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 성경은 모든 신자의 필요에 대해 완벽할 정도로 절대 권위를 갖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책망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의 전통을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과 같은 위치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그들의 전통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것이라고 언급함으로써 진리의 그 자체의 기반을 무너뜨리려고 했기 때문에 그들을 정죄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다”(막 7:1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도표의 오른편을 보시면 우리는 카톨릭 교회가 진리의 바탕이라고 주장하는 기준을 볼 수 있습니다. 카톨릭 교회는 신조 구문 80과 81를 통해 이런 주장을 합니다. 신조 구문 (para) 80: “거룩한 전통과 거룩한 성경은 서로 긴밀하게 묶여 있으며 서로 통한다.” 신조 구문 81:  “거룩한 전통은 전부 주 그리스도와 성령에 의해 사도들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그러나 그 어떤 전통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전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작업은 오직 성령의 일입니다. 첫째, 사도 베드로가 언급한 것처럼 성경은 배타적인 의미에서 오직 성령에 의해서만 지어졌습니다. “(성경은)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벧후 1:20, 21).

거룩한 전통을 거룩한 성경과 동일시하고, 전통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한다고 주장하는 카톨릭 교회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결과적으로, 계시의 전달과 해석은 카톨릭 교회에 위임되어 있으며, 카톨릭 교회는 모든 계시된 진리들에 대한 교회의 확실성을 거룩한 성경에서만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성경과 전통, 이 둘은 동등한 헌신과 경외함으로 귀하게 여겨지고 받아들여져야 한다” (신조 구문 82).

이 내용은 성경의 충분성과 성경의 권위의 유일성을 정식으로 부인하고 거부합니다. 기독교라고 주장하는 교회가 전통을 성경만큼 동등하게 사랑할 것을 주장한다는 것은 성경을 아무런 가치가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치 어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한다고 선언하면서 동시에 길가의 다른 여인을 동등하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랑은 불륜인데, 로마 카톨릭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 교회가 교회 전통을 성경과 “동등한 헌신과 경외함”으로 대한다는 것은 성경을 거절하고 성경의 하나님을 져버린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카톨릭 내부에서의 진리의 기반은 절대적입니다. 그 절대적 기반은 기록된 말씀의 하나님의 권위가 아니라 사람의 권위, 즉 로마 교회의 권위입니다. 카톨릭 교인들에게 궁극적인 권위는 통치하는 교황의 결정들과 법령들에 있습니다. 신조 구문 891은 이 사실을 언급합니다. “최고 권위의 교황은 그의 직분과 관련해서 절대 오류가 없는 가르침의 권위를 소유한다. 그는 모든 신자들의 최고 목자이며 선생이시다. 교황이 명백한 행위로 선포하는 것은, 믿음의 교리이던, 도덕에 관한 교리이던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따라서 실제로는 카톨릭 교회의 교리의 기반은 교황이며, 그가 말한 것은 진리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칙령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공의회에 의해 몇몇 교황들이 이단으로 정죄받고 선포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주장입니까!

이제 이 도표의 두 번째 주제인 “오직 은혜만으로 얻는 구원”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성경은 놀랍게도 불법과 죄악으로 죽은 죄인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라고 선언합니다.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은 다음 성경 구절에서도 요약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엡 2:8-9). 이 구절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완벽한 생명과 희생으로 절대적이고 완벽한 구속을 이루심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심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내용과는 정반대로 도표의 오른편을 보면 카톨릭의 구원은 교회의 성례를 통해 받을 수 있는 은혜를 통해 오는데, 이때 은혜는 도움일 뿐입니다. 따라서 카톨릭 교회는 공식적으로 “은총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양자로 부르실 때 우리가 응답할 수 있도록 주신 도움이다. 은총은 우리를 성삼위적 생명과 친밀하도록 인도한다” (신조구문 2021)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시는 도움에 반응할 수 있을 만큼은 선하다고 추정하는 것입니다. 은혜는 구원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활동이라기 보다는 단지 인간들에게 주어진 “도움”인 것입니다. 은혜에 대한 카톨릭의 가르침은 사실 ‘은혜’라는 개념과는 정반대인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롬 11:6).

또한 소위 카톨릭이 말하는 은혜는 성례 성사를 필요로 합니다. 카톨릭 교회는 “교회는 새 언약의 성사가 신자들이 구원을 얻는데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증한다. ‘성사 은혜’는 성령의 은혜로서 각 성사에 고유한 은총을 그리스도께서 주신다”(신조구문 1129)라고 언급합니다. 이 가르침은 과히 깜짝 놀랄만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의 절대적인 능력에 의한 것이지만, 카톨릭 교회는 은혜를 단지 도움이라고 정의하며, 따라서 그 도움을 받으려면 물리적인 성사들이 필요하게 됩니다.

이제 도표의 세 번째 주제 “하나님이 주시고 유지하시는 믿음”에 대해 다루어 봅시다. 성경을 보면 믿음의 대상은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인격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사도행전 16:31절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언급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다고 선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벧후 1:1).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로마서 10:17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생깁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이라는 주제는 성경에서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과연 교회가 믿음을 왜곡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톨릭 교회는 믿음의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습니다. 카톨릭 교회는 신조 구문 168에서, 신자가 제일 먼저 믿어야 하는 것으로서 교회에 대한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제일 먼저 우리는 교회가 나의 믿음을 품어내고 영양분을 공급하고 유지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 다음 신조 구문은 교회는 우리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교회를 통해 생긴다고 과감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카톨릭 교회가 공식적으로 가르치는 내용은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를 통해 믿음의 생명을 받기 때문에 교회는 우리의 어머니다”(신조구문 169)라고 말합니다. 결과적으로 카톨릭 교회는 사람으로 하여금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교회 어머니(Mother Church)를 믿게 합니다. 카톨릭의 공식적 선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교회적 차원의 행위이다. 교회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보다 앞서며, 우리의 믿음을 만들어내고 지지하고 양육한다. 교회는 모든 신자의 어머니다.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 (신조구문 181).

그러므로 카톨릭 신자들은 거룩한 교회 어머니(모 교회)와 그리고 교회가 말하는 믿음의 법칙을 따르도록 강요 받게 됩니다. 만일 왜 그렇게 따라야 하는지 질문하게 되면,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거룩한 교회 어머니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옳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주제는 “그리스도의 희생의 충분성”에 대한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그분의 희생이 법적으로 완벽하게 마무리되었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10:12절은 주님의 희생은 죄악을 위해 단번에 드린 영원한 희생이라고 말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단번에 영원히 드린 제사는 그리스도에 의해 드려진 제사 밖에 없다고 히브리서 1:3절이 말하고 있습니다.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러나 카톨릭 교회는 이와 전혀 다른 주장을 합니다. 즉, 십자가에서 드려진 그리스도의 희생은 교회의 미사에 담겨 있으며 그 미사를 통해 드려진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카톨릭 교회의 공식 입장은 신조 구문 1367에 있습니다. “십자가의 제단 위에서 피를 흘리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렸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미사에서 거행되는 신성한 제사에 담겨 있으며 피 없는 방식으로 드려진다.” 카톨릭 교회는 더더욱 믿을 수 없는 참으로 잘못된 결론을 짓습니다. 즉, 교회가 주님과 함께 교회 자신을 드리는 제사는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라는 것입니다.  신조 구문 1368은 공식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그 머리와 함께 봉헌된다. 교회는 그 머리와 함께 자신을 전부 온전히 드린다.” 이 신조는 참으로 신성 모독적입니다. 그 이유는 교회와 그 지체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주님의 고난의 희생 제사가 된다고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다섯 번째 주제는 “하나님만이 완전히 거룩하며 거룩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지혜와 능력과 거룩과 공의와 선함과 진리에 있어서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며 불변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십니다. 그분의 거룩은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망라하는 속성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는 거룩하고, 그분의 진리는 거룩하고, 그분의 공의는 거룩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모든 속성의 각각이시기도 하지만, 모든 속성을 망라하는 거룩의 속성은 하나님을 모든 다른 존재로부터 구별합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다른 존재이십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사무엘상 2:2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이 내용은 대단히 심각한 내용입니다.

카톨릭 교회의 공식 가르침은 하나님의 거룩을 선포할 뿐만 아니라 마리아도 지극히 거룩한 분 “the All Holy One” 이라고 선포합니다. 이때 마리아에게 쓰이는 “지극히 거룩한 분”에는 대문자로 되어 있고 다른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신조 구문 2677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리아에게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기를 청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불쌍한 죄인들임을 인정하고 우리 자신을 ‘자비의 어머니, 지극히 거룩하신 분(the All Holy One)’께 의탁한다.” 카톨릭의 공식 가르침은 다음 언급에서 불경의 극치를 이룹니다. 신조 구문 2030입니다. “신자는 교회로부터 거룩의 본을 배우며 전부 거룩한 동정녀 마리아는 거룩의 모델이며 원천인 것을 인정한다.” 이 신조는 한 인간을 “지극히 거룩한 분”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또한 거룩의 원천으로 선언하고 있으니 참으로 신성 모독적인 내용입니다.

여섯 번째 주제는 “한 분의 중보자” 입니다. 이 주제는 다른 주제와 마찬가지로 대단히 심각한 주제입니다. 그 이유는 중보자는 참으로 “신-인(God-Man, 사람이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분만이 죄인들을 하나님과 관계를 맺도록 하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치 때문에 성경은 디모데전서 2:5절에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도행전 4:12절은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카톨릭 교회는 마리아가 중보의 역할을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마리아를 “미디아트릭스”라는 여성 명사를 사용해서 중보자라고 부릅니다. 그들의 공식적 신조 구문 969를 봅시다. “하늘로 승천하신 마리아는 구원하는 사역을 내려 놓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의 수많은 중보에 의해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선물들을 계속 가져오신다. … 그러므로 복되신 동정녀는 교회 내에서 변호인, 후원자, 은인, 중보자로 불린다.”

성경은 오직 한 중보자만 말합니다. 그러나 카톨릭 교회는 두 중보자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시며 다른 하나는 여성 중보자로서 영광 받으시기 합당하신 동정녀입니다. 카톨릭 가르침은 신자들의 중보자는 주님 한 분 밖에 없다는 가르침을 제거함으로써 주님만이 반드시 필요한 중보자는 아니라는 생각을 사람들에게 남깁니다.

일곱 번째 주제는 “우상 숭배”입니다. 성경은 우상을 만들거나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분명하게 금하고 있습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출 20:4-5). 이 내용에 대한 설명은 신명기 4:13, 15-16절에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에게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 여호와께서 호렙 산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그리하여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해 어떤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지 말라 남자의 형상이든지, 여자의 형상이든지, ….” 즉, 하나님의 형상이나 모습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금하는 것은 아버지, 아들, 또는 성령의 모양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카톨릭 교회는 사람이 우상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합리화시킵니다. 신조 구문 2132를 보시면 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형상을 숭배하는 것은 우상을 금한 첫째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는, 형상에게 드려지는 존경은 그 형상의 실체에게 전달된다. 어떤 사람의 형상을 숭배한다는 것은 그 형상이 묘사하는 실제 인격체를 숭배하는 것이다” (신조구문 2132).

이 논리는 형상에 의해 묘사되는 인격체가 숭배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논리는 정확하게 성경이 금하는 것이며, 아론이 출애굽기 32장에서 행했던 것이 하나님에 의해 금지되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카톨릭이 우상을 합리화하기 위한 둘째 논리는 신조 구문 2131에 있습니다. 그 구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성육신된 말씀의 신비에 그 근거를 두고 제 7차 니케아 공의회(787)는 … 형상을 숭배하는 것을 합법화하였다. 즉, 그리스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어머니, 천사들, 모든 성자들의 형상 숭배를 허용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은 성육신함으로써 형상에 관한 새 경륜을 도입하셨다” (신조구문 2131).

이러한 역사적인 논리는 8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형상에 대한 새 경륜을 도입하신 사건으로써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마음을 바꾸시지 않기 때문에 신성모독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구약의 10계명과 똑같이 강력하게 우상 숭배를 정죄합니다. 이 주제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소위 성경을 믿는 많은 현대의 교회들이 단지 그리스도의 인격을 이해하기 위해 형상을 사용한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사진들, 그리스도의 비데오를 합리화시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카톨릭 교회가 가진 같은 논리를 이용하여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금하신 우상 숭배를 합리화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적이라면 우리는 아버지, 아들, 또는 성령의 품격들을 보이는 사진이나 비데오 같은 형상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마지막 주제는 “죽은 자와의 교통”입니다. 이 표현은 카톨릭 교회 신조 구문 958에 그대로 있습니다. “죽은 자와의 교통: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몸 전체는 이 교통을 충분히 의식하며 교회는 기독교 종교의 가장 초기 때부터 그의 순례자들과 함께 커다란 존경심을 가지고 죽은 자들을 기억하여 왔다. …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는 그들을 도울 뿐만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위해 드리는 중보 기도를 더욱 효력 있게 한다.”

죽은 자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기도를 드린다는 개념은 철저하게 성경과 정반대 개념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도표의 양 측면을 읽기를 부탁합니다. 여러분 스스로 이 주제를 보시면서 카톨릭 교회가 어떻게 신명기 18:10-11절의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여기서 초혼자란 죽은 자를 부르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 도표 전부는 성경을 통해 카톨릭 교회의 잘못들과 신성 모독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리고 카톨릭 교회가 공식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연구해 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를 말해 줍니다. 그것은 단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내세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살게 될 것을 기대하듯이 우리는 지금 우리의 생애 가운데 하나님과 교통하며 살기를 원하는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카톨릭 교회의 공식 가르침은 이 땅의 생애 가운데 부도덕한 삶을 살도록 하는 길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저주로 이끄는 길입니다. 카톨릭 사제 직분 내에서 끔찍한 도덕적 부패의 실태들을 보게 되는 것은 참으로 슬픕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얼마나 카톨릭이 잘못된 시스템인지를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스템 안에 있는 귀한 영혼들, 그리고 멸망으로 향하는 길 잃은 카톨릭 영혼들에 다가갈 수 있는 사랑과 긍휼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 도표는 카톨릭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들이 매일의 삶 가운데서 기회가 닿는 대로 이 도표를 나누어주기를 부탁 드립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카톨릭에 속한 귀한 영혼들이 구원을 받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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