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친구 여러분!
교황 프란체스코의 신비감과 그를 향한 칭송 및 영웅 숭배 가운데 그의 특징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 특징은 그의 예수회 영성 수련입니다. 예수회 영성 수련은 사람들을 영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어떻게 사람들을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한 교황 프란체스코의 시스템입니다. 그는 분명한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예수회 영성 수련을 철저하게 수련하였습니다. 우리는 언론과 수많은 에큐메니칼 복음주의자들이 교황 프란체스코에게 아첨하는 상황에서 성경의 진리에 따라 그의 정체를 분별할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친구와 가족들에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교황 프란체스코의 정체 – 예수회 영성 수련의 우두머리
리차드 베네트
교황 프란체스코가 교황직에 앉은 후 첫번째 해 기념일에 우리는 예수회 회원들이 지금까지의 프란체스코의 사역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해 아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이에 적절하게도 예수회의 유명한 잡지인 <아메리카>의 총편집자인 제임스 마틴(James Martin, S. J.)이 특집으로 “여전한 예수회 회원, 교황 프란체스코”라는 제목의 간략한 온라인 비데오를 구성하였다. 그 비데오의 부제목은 “교황의 예수회 정체를 보며”이다.
마틴은 프란체스코가 한때 예수회 조직 중에 아르헨티나 지역의 초보 디렉터였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프란체스코가 그 자리를 얻으려면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의 <영성 수련>(Spiritual Exercises)에 대한 자료를 철저하게 숙지해야 했다. 마틴의 판단에 따르면 프란체스코의 정체가 예수회 회원이었다는 사실은 현재 교황으로서의 그의 행동에 대단히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새 교황의 독특한 성격과 관심과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려고 한다면 그의 정신과 삶을 빚어낸 요소들이 무엇이었는지 파악하는 것은 당연하겠다. 우리가 이 부분을 알아야만 왜 ‘이’ 프란체스코가 바티칸이 뽑은 교황이 되었는지 분명하게 알게 될 것이다.
필자는 이미 프란체스코가 부패하고 타락한 카톨릭 교회의 비참한 사건들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는 카톨릭 무리들을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리는데 상당한 개인 능력을 보여주었다고 언급하였다.
그 과정에 당황스러운 일들과 좌절과 장애가 있었지만 프란체스코는 효과적으로 로마교의 끔찍한 도덕적 위기의 진짜 요인들과 결과들을 곁으로 감추고 신도들의 마음을 다른 것으로 유인하였다. 신도들은 ‘권위있는’ 오랜 영성 스타일의 대작 공연을 관람하며 열광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그가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 발코니에 처음으로 등장한 순간부터 그는 성 베드로 광장에 모여 있는 군중들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간절하게 탄원하였고 그 이후 그는 다가갈 수 없는 사람들과 더러운 죄인들을 찾아다니며 평민들과 원수들의 발을 씻어주었다.
이렇게 하여 프란체스코는 지속적으로 전 세계적으로 카톨릭을 향해 낙망과 허탈에 빠진 신도들을 향해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어 내었고 이에 그들은 그의 말을 듣기를 원하며 이제 ‘그의 인도함을 받을 준비’까지 되어 있다. 예수회의 신비한 영성 방법 및 기술을 사용하여 ‘카톨릭 교회’를 구출하려는 그의 굳은 사명은 놀라운 결실을 맺고 있다. 이는 희생자들의 마음을 달래고 그들을 기꺼운 마음으로 순복시키도록 만드는 이그나티우식의 방법이 얼마나 지속적인 역사를 나타내는지 보여주고 있다.
“영성 수련”을 강조하는 역사적인 배경
동방 명상의 목적은 신과 직접 접하는 것이다. 12세기 또는 13세기의 유럽에서는 동방 신비주의에 대한 관심이 크게 일어났고 교황은 이러한 관심을 이용하여 로마 신성 제국의 정권을 다스렸다. 초기 세기 동안은 참된 복음 전파자들이 복음을 들고 유럽과 영국 제도를 크게 복음화하였다. 하지만 12세기 즈음에는 교황은 종교 재판을 실시할 정도로 권력이 강하여져서 정부로 하여금 카톨릭의 지시에 불복하는 자들을 고문하고 살해하도록 할 수 있었다. 교황은 신성 로마 제국에 거하던 수많은 이방인들 사이에서 복음을 증진하기보다는 그리스도인이든,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들 모두를 꼬드겨 교황이 정부의 권력을 맘껏 휘두를 수 있는 그러한 종교 시스템을 지지하도록 만드는 일에 바빴다. 교황은 단 한번도 참 복음을 붙든 적이 없었으며 따라서 신성 로마 제국 내의 이방 풍습들을 쉽게 받아들였다. 로마 교회는 이러한 이방 풍습들을 기독교라는 외형의 껍질로 회칠하였다. 복음과 성경에 기초한 참된 영성을 붙들지 못한 교황 교회는 어느새 동방 알렉산드리아의 이집트 신비주의가 활개를 칠 수 있는 완성맞춤의 장소가 되어 버렸다.
무너져가는 동방 정교 제국의 남은 무리들을 향하여 이슬람이 강력하게 공격하여 들어오자 은둔 수도승들은 플라톤 이상주의 및 신비주의 훈련에 큰 영향을 받은 거짓 영적 지도자들의 무리들과 함께 보다 안전한 서부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그러자 서방 수도승들은 철학적인 성향을 취하면서도 심리적인 영향을 끼치는 종교 체험에 기초한 새로운 형태와 관행에 의해 신속하게 영향을 받게 되었고 이에 그들 역시 거짓 기독교 영성 및 새로운 영역의 명상을 탐험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13세기에는 성 프란체스코의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성 도미니크의 도미니크 수사회와 같은 새로운 수도 훈련에 이러한 신비적인 요소들이 등장하였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16세기에 들어와서 루터는 오직 성경의 권위 위에 서서 복음을 회복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얻을 수 있고 오직 믿음에 의해 받을 수 있으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허락되어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칭의의 구원을 전파하였다. 그의 복음 전파는 거친 불꽃처럼 유럽 전역을 휘쓸며 퍼져나갔다. 하지만 16세기 중엽이 되자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 아빌라의 테레사, 십자가의 요한 등과 같은 신비주의자들이 다시 등장하여 신비주의를 발전시켜 체계화시키더니 글로 남겼다.
로욜라의 <영성 수련>(Spiritual Exercises)은 로마 카톨릭 내에서의 전형적인 신비 운동이다. 그 핵심은 주로 상상을 통해 한 개인의 생각과 행동을 소위 ‘하나님의 은혜’에 연결시키는 시도이다. 16세기에 잘 알려진 이들 신비주의자들은 어떻게 사람이 신과 인격적으로 직접 접할 수 있는지 그 단계를 설명하고 있다.
로욜라 <영성 수련>의 요약
와일리(J. A. Wylie)는 <영성 수련>을 요약하기를 소위 성경에서 회심으로 알려진 것을 기믹하게 흉내낸 것이 <영성 수련>이라고 말한다. 와일리는 어린 헤라클레스(예수회의 수도)의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로욜라는 <영성 수련>이라는 제목의 책을 미리 준비하였다고 설명한다. 이 책은 인간들이 어떻게 ‘회심’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 책은 일주일 동안 어떻게 마음을 모아 회심할 수 있는지 4개의 깊은 묵상과 참회와 고독의 방법을 알려준다. 그 과정은 4 주 안에 멸망의 문에서 낙원의 문으로 나아가는 전형적인 여행을 보여주면서 각 단계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명하고 있다. 그 과정에는 은둔을 통한 금욕, 지적인 자아부인과 고행, 그리고 수련의 황홀경이 나타난다. 로욜라의 <영성 수련>은 꾸란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계시로 여겨지고 있다. 어떤 예수회 회원은 말하기를 “(로욜라의) 영성 수련에 관한 책은 참으로 하나님의 손가락에 의해 쓰여져서 하나님의 거룩한 어머니에 의해 이그나티우스에게 전달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영성 수련>은 성경 및 신학적 언어로 ‘회심’이라고 표현되는 엄청난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일종의 규칙이다. 한편, <영성 수련>이 쓰일 당시 하나님의 역사로 인한 회심의 역사가 개신교 세계 내에서 수없이 발생하고 있었다. 로욜라는 모세와 대결하려 하였던 고대 마술사들처럼 그의 마술을 사용하여 복음의 기적을 흉내내려 하였던 것이다.
로욜라가 교황 바울 3세에게 굴복한 사건
와일리는 로욜라가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로마의 교황 바울 3세에게 굴복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로욜라와 그의 아홉 동료는 1534년 8월 15일, 전쟁에 나가기 위해 군대로 자원한다. 그들은 어느날 몽바르트 교회에서 이슬람의 사라센 제국과 죽음을 걸고 싸우겠다고 맹세한다. 하지만 공화국(로마 교회에 속한 이탈리아의 주들states을 의미한다 – 역주)과 이슬람 터키 정부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면서 아시아로 가는 문이 닫혀 버렸다. 그러자 그들은 이를 서방 세계에서 활약하라는 신의 지시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서방의 로마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으며, 그후 영원한 도시인 로마로 향하면서 지나가는 모든 도시에서마다 병원에서 수고하고 거리의 군중들에게 간절하게 외침으로 덕망 높은 사람들로 큰 명성을 얻었다. 그들이 로마에 가까워질 즈음에 그들 동료 중에 몇 사람이 낙심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로욜라는 어떤 환상을 보고 힘을 얻었다. 그 환상은 주께서 그에게 나타나 “로마에서 내가 네게 자비를 베풀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환상이었다. 이 환상이 부어넣은 소망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기독교 수도인 로마의 문을 들어선 후 그들이 교황 바울 3세의 발 앞에 꿇어엎드리자 그들은 가장 은혜로운 영접을 받게 되었다. 교황은 그들의 돕겠다는 제안을 대단히 중요한 기회로 삼으며 반가워하였다. 그 당시 교황권은 유럽의 반이 교황을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큰 위기에 처해 있었고 오랜 수도회들은 무능한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로욜라와 그의 추종자들의 도움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기대치 못한 새로운 도움이었다. 교황 바울 3세는 이러한 도움에 대해 반가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새로운 조직의 규칙과 법이 만들어지고 마침내 교황이 승인하였다.
새로 제안된 조직은 두 개의 특징을 지녔는데 그 특징은 교황 바울 3세의 마음에 꼭 들었다. 첫번째 특징은 교황에게 무조건 순종하겠다는 맹세였다. 새 조직은 군대가 대장에게 순복하듯이 교황에게 순복하겠다고 맹세하였다. 이 특징은 교회 법령에는 속하지 않더라도 그 조직 회원들은 무조건 군사처럼 교황에서 복종하기로 맹세해야 한다. 따라서 교황은 그들에게 아무 때나 어느곳이든 어떤 부탁이든 내릴 수 있다. 요약하면, 그들은 수도사들이라기보다 교황을 위한 일종의 군대 조직이었다.
교황 프란체스코는 로욜라의 <영성 수련> 및 군대와 같은 복종에 철저하게 물들어 있는 사람이다. 이제 그는 교황으로서 세상 무대에 서서 “영성 수련”이라는 이름 하에 이러한 거짓 회심을 위한 지식과 훈련을 퍼뜨릴 수 있게 되었다. 이 거짓 회심은 성경 및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전혀 무관하다. 우리는 이그나티우스의 수련은 신비주의적인 면을 지닐 뿐만 아니라 또한 도덕적인 면을 지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영성 수련”은 도덕적인 면으로 나타난다.
교황 프란체스코는 그의 이그나티우스 훈련을 드러내는 여러 방법들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그의 설교이다. 그는 청중에게 죄와 의와 다가올 심판을 깨닫게 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거나 성경을 해석하기보다는 “여러분의 눈을 감고 이러한 상상들을 해 보세요”라고 설교한다. 이는 지성에 호소하기보다 감성에 호소하는 방법이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객관적인 진리를 호소하기보다 인간 개인의 주관적인 감성에 호소한다. 제임스 마틴이 정확하게 평가한 것처럼 “눈을 감고 기도하는 가운데 예수님께 말하라는 호소는 매우 이그나티우스적인 요소이다”.
<영성 수련>이 강조하는 것은 상상이다. “지옥의 여러 구체적인 무시무시한 면들을 볼 수 있다고 상상해 보라. 유황 냄새가 난다고 상상해보라.” 이런 식으로 그는 은혜와 진리가 없는 상상을 조장한다. 이는 이그나티우스가 신비주의자들의 글들을 읽으면서 배운 것들이지만 성경이 제시하는 방법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성경은 “사람의 마음이 상상(생각)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 8:21)고 말한다. 따라서 주께서 성령을 통해 죄인의 이전 상태가 얼마나 악한지 깨닫게 하는 것은 크신 자비이다.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당하신 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이다. 하나님의 은혜 만으로 오직 믿음을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는 자가 구원을 받아 영생에 이른다.
구원을 받지 못한 죄인이 성경만이 최종 권위를 갖는다는 사실을 배우지 못한 가운데 어찌 복음을 알 수 있겠는가? 어떻게 구원 받지 못한 죄인이 성경을 읽지 않거나 또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가운데 참 복음을 알 수 있겠는가?
로마 교회를 향한 이그나티우스의 가장 지대한 공헌은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한 통치자들과 평민들에게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무조건 복종하도록 틀을 만들어 가둔 것이다. 그의 주요 전략은 그의 조직원들로 하여금 어떻게 하면 성경을 믿는 사람들을 카톨릭으로 회심시킬 수 있는지 고도의 다양한 기술과 방법을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그 교과서가 바로 <영성 수련>이며 이는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과 신비한 연합을 이룰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그 연합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참된 회심이 아니며 또한 하나님과의 참된 연합도 아니다. 오직 거짓 대용물이다.
복음이 없는 주관적인 신비주의에 빠지게 되면 사제들 및 평신도들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게 된다. 오직 로마 교회에 의해 전달되는 지시만 받을 뿐이다. <영성 수련>을 완벽하게 수련한 프란체스코는 이제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고 있다. 즉, 그의 목적과 바람은 오직 하나님을 위하겠다는 것이다. 교황 프란체스코는 “영성 수련”의 용어를 사용하여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의 대장들” 중에 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즉, 그는 이제 교황으로서 자신의 양심에 따라 주관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양심이 부패한 사실을 잊고 있다. 따라서 예수회 수사인 마틴이 지적한 것처럼 교황 프란체스코가 카톨릭 전통을 깨뜨리고 아무 때나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그 이유는 그는 성경의 권위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거나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 마음의 주관에 따라 다른 모든 것에서 자유한 가운데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예수회 회원인 첫번째 교황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성경의 권위가 아닌, 심지어 성경과 전통의 권위도 아닌, 오직 한 개인의 양심의 권위로 모든 것을 통치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현 시대의 이그나티우스 영성
예수회 조직원들은 <영성 수련>을 열심히 촉진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의 웹 사이트 www.ignatianspirituality.com 를 보면 <영성 수련>은 명상과 기도와 로욜라의 성 이그나티우스의 묵상 수련을 모아놓은 것으로서 인간들이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을 돕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수 세기 동안 로욜라의 <영성 수련>은 30일 동안 홀로 침묵하며 지내는 “장기 수련회”(long retreat)로 대대로 알려져왔다. 최근에는 일반인들을 위한 <영성 수련> 프로그램들이 많이 개발되어 있다. 이제 <수련>을 통해 가장 강조되는 부분은 “매일의 수련”이며 이 수련은 한달 동안 진행되면서 영성 수련 조교와 날마다 만나며 기도하는 프로그램이다. 현재 이러한 수련 프로그램은 현대인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개발된 상태이다.
우리는 예수회 영성과 도덕은 로욜라의 신비주의 비법과 로마 교황의 절대 권위 체제를 합쳐놓은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회의 글들과 가르침의 스타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오직 홀로 있도록 만든다. 수련 제자들은 지성적이거나 논리적인 차원의 판단을 멀리하고 새로운 실체와 도덕 규범을 자연스럽게 껴안게 된다. 그러면서 새로운 교조주의에 물드게 된다. 예수회의 교훈은 생각하는 기능보다는 상상 및 감정의 기능을 자극함으로써 수련생들로 하여금 이성적인 판단과 정신적인 활동을 저지하도록 한다. 즉, 사람을 홀로 있게 만든 후에 모든 정신적인 기능을 벗어 던지게 함으로써 마음과 의지를 굴복시키는 기교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현 시대의 예로, 예수회 회원 짐 하르바(Jim Harbaugh)를 고려해 보자. 그는 <성 이그나티우스의 영성 수련에 이르는 12 단계 접근>이라는 책을 썼다. 그 책은 예수회 사상과 현대 인본주의 치유를 합친 기막힌 작품이다. 이 책은 로욜라의 <영성 수련>과 알코올 중독 치유 프로그램을 계속 비교한다. “영성 수련”으로부터 12 단계를 끄집어낸 것은 알콜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12단계와 연관된다. 이처럼 예수회 회원 짐 하르바는 요사스럽게도 사람이 새로운 영성과 독립의 길을 배울 수 있다고 언급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의 마음이 사악한 예수회 철학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는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성경의 증언에 대해 무감각하게 되고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서 그분의 사역에 의해 주어지는 구원의 길에 대해 무지하게 된다.
이처럼 <수련>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가질 수 있도록 돕는 수단이라기보다 사교의 구상화에 이르는 비법이다. 이 수련은 비록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며, 나아가 영적인 만족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성경이 금한 우상, 즉 상상을 통한 우상을 허용하고 있다. 상상에 의해 그려지는 하나님은 성경 및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시는 메시지와 전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들이 “떼제(Taize) 모임”을 열고 반복되는 주문과 침묵의 명상, 촛불을 켜놓은 분위기로 청년들을 미혹하고 있다. 중요한 사실은 이 모든 형식들과 수단들이 단지 인간의 기술이라는 사실이다. 즉, 그러한 수련의 방법들은 인간의 상상 기능과 물질이 상징하는 바가 서로 교차할 수 있도록 계획된 것들이다. 그 방법들은,
- 어떤 분위기나 감정을 조장하며
- 감성 및 상상을 통한 우상에 집중함으로서 판단 기능이 마비되고
- 위장의 모순에 의해 야기되는 이성적 스트레스의 위험을 인위적으로 줄이고 있다.
- 이상적으로 나아진 순종적인 자아를 의식하며 고취된 가운데 수련 프로그램 및 권위에 자발적으로 순종함으로써 이제는 외부 세상에 행복하게 적응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신비주의에 대한 현대인들의 관심
서방에서 신비주의에 대한 관심이 크게 일어난 현상은 지난 20세기 초로 거슬러올라간다. 그 당시 복음주의 교회는 하나님의 모든 경륜과 복음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에 미흡하였다. 20세기 중반에는 그 유명한 히피 운동이 영국과 미국에서 강력하게 나타났다. 특히 히피 운동은 대학과 일반 문화 활동에 만연하였다. 그 운동의 바탕에는 “하나님은 죽었다”는 대대적인 선포가 있었고 그에 따른 행동들이 있었다. 모든 진리는 도덕을 포함하여 상대적인 것이 되었다. 이러한 진공 상태 가운데 신비주의가 들어왔다.
카톨릭 신비주의에 대한 현대인들의 관심은 20세기 토마스 머턴(Thomas Merton, 1915-1968)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토마스 머턴은 켄터키 겟세마네 수도원의 트라피스트회 수도승이었다. 머턴은 자신의 경험으로 비추어볼 때 자아 부인 및 신비 체험은 로마 교회에 철저하게 복종하는 결과를 빚는 것을 확신하였다.
머턴 이전에는 이그나티우스가 신비 체험의 기만을 사람들에게 제시하였듯이 이제 21세기에 들어와서는 브리이언 맥클라렌이 이러한 현혹하는 속임수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다.
맥클라렌은 현재 영향력 있는 이머전트 교회의 지도자이다. 그는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의 신비주의적인 환상을 따르고 있다. 맥클라렌의 책 <관용하는 정통>(A Generous Orthodoxy)를 보면, 그는 뻔뻔스럽게도 그의 “이머전트 사고”가 어떻게 역사하는지 설명하고 있다. 그의 책의 목적은 모든 복음주의자들과 카톨릭 신도들을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맥클라렌은 “성경은 하나님께서 생겨나게 한 어떤 것이다. 마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후에 다양한 인종들과 사회와 문화가 발생한 것처럼 말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맥클라렌의 가르침이 로마 교회와 같은 선상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교황 교회는 이러한 말을 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교회 법은 같은 개념을 전한다. 즉, “성경은 거룩한 전통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다.”
맥클라렌은 분명하게 인간이 만들어낸 것들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과 동등한 자리에 두려고 시도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의 권위를 깍아내리려는 심각한 시도이다. 기록된 성경의 권위를 그런 식으로 가볍게 만드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진리를 우습게 여기도록 만드는 것과 같다. 맥클라렌은 로욜라와 교황 프란체스코와 마찬가지로 영혼을 망하게 하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는 성경을 알 수 있는 핵심 지식(곧, 성경의 절대 권위 – 역주)을 제거하였기 때문이다.
신비주의의 절정과 응용
동방 신비주의는 중세 시대의 카톨릭 신비주의처럼 이 시대의 문화를 병들게 하고 있다. 현대 시대의 자아에 대한 도취와 집착은 객관적으로 계시된 권위있는 진리를 거부하는 반작용과 함께 거짓 영성이 활동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장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가운데 동방 신비주의와 뉴에이지 운동이 활개를 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처럼 해체되는 사회 속에서 현대판 예수회 <영성 수련>이 서방이 처하여 있는 혼란 가운데 은둔처를 구하는 자들에게 호소력을 가지게 되는 것은 자명하다. 교황 프란체스코가 예수회 회원이라는 사실은 종교적인 불신자들과 무지한 신자들에게 <영성 수련>을 선전하고 권장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에 따라 아는 것은 진리라고 불리는 또 다른 신과 또 다른 기준을 성급하게 따르는 자들에게 큰 슬픔이 더하여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영성 수련”의 환상을 쫓는 자들의 운명이다. 부패한 정욕의 마음을 채우기 위해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를 개발하는 자들의 운명은 참 하나님과 그분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심판 밖에 없다. 비성경적인 방법을 증폭시키는 자들은 실은 그들 자신에게도 이생에서뿐만 아니라 내세에서도 번민과 고통을 증가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다. 성경은 그들이 멸망하게 되는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한다.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살후 2:10-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세상이 교황 프란체스코의 업적을 위대한 영적인 지침이라고 칭찬하고 있다. 악한 자들은 어둠을 사랑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빛을 사랑한다! 교황 프란체스코와 예수회는 맹목적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내면의 신’과 동등시하였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인간의 자아 실현과 내면의 계몽으로 대치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의 모든 방법으로 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막고 있다. 더욱이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내면의 감각이기 때문에 종종 합리적인 생각이나 성경적인 사고 방식을 적극적으로 방해한다.
이제 성령의 책망 없이 어찌 그들이 자신들의 사악함의 깊이를 알 수 있겠는가! 만일 그들이 성경을 연구하지 않는다면 어찌 그들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는 진리를 알 수 있겠는가?
복음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영성 수련>에 기름을 붓는 인간의 부패한 상상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여전히 승리하며 구속하며 구원한다. 성경은 은혜를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설명한다. 은혜는 구원을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구원의 목적을 이루는데 있어서 가장 효력있고 강력한 무기이다. 주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는 여전히 교황 프란체스코 및 이머전트 교회의 그러한 지도자들의 교만을 무너뜨릴 수 있다. 앞으로 성경의 진리를 부인하는 소위 현대 복음주의 지도자들의 거짓 및 기만적인 타협은 복음을 통한 성령의 직접적인 사역에 의해 무너질 것이다.
복음만이 여전히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구원 받은 자들은 누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롬 3:24)들이다. 주관적이고 비이성적인 사색과 대조하여 복음은 객관적이며 이성적이고 일관적이며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든든하게 서 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은 인간의 교만과 인간의 교훈을 무너뜨리는 큰 망치이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모두 “허물과 죄로 죽었던”(엡 2:1) 자들이었으며 삶에 있어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항하며 사는 반역자들이었다. 우리는 율법의 저주에 합당한 자들이었다. 하지만 은혜의 복음 안에 있는 하늘 아버지의 사랑은 우리를 그분의 불꽃같은 진노로부터 구원하였다. 우리는 그분의 은혜에 의해 믿음 안에서만 주를 의지하며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구원을 바란다. 우리는 성령의 확신에 의해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에 뿌리를 두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주로 믿는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그러한 은혜와 사랑이 우리 마음 속에 녹을 때 우리는 감사 가운데 영원히 찬양할 것이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시 115:1)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리차드 베네트 (베뢰아 등대 대표)